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요즘 밤에 나는 잠을 자거나 쾌락을 누리거나 고독을 즐기는 대신 카페 테라스에 앉아 밤새도록 절망에 빠진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내가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액면가 높은 동전 한 움큼이나 전후 마르크 한 다발하고 바꿀 수 있을 금화 같은, 절대 변하지 않기에 아무리 평가절하되어도 원래의 가치를 간직할 수 있 는 금화 같은 참되고 진실된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라워한다. - P133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미헬이 감자 모종을 옮겨 심던 정원에서 마침내 나는 모두가 아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콘라드만은 끝까지 모르도록 동료들이 세심하게 지킨 그 비밀은 바로 소피가 리투아니아인 하사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이다. 그 하시는 이후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다음날 거실에서 서른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소피에게는 끔찍 했던 전날의 십오 분보다 그 순간이 더 역겨웠으리라. 이후 몇 주 동안 그녀는 그 기억에 괴로워했고,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 다. 나는 소피와 많이 친해진 뒤에도 그 불행한 사건에 대해 흐릿한 암시조차 입에 담을 용기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그 주제를 늘 밀쳐냈고, 하지만 그것은 늘 우리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 P143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 P145

몇 주 동안 소피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상대에게 그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 미친듯이 화가 날 때 겪는 온갖 끔찍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런 뒤에는,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에 짜증을 냈고, 결국에는 몽상적인 인간들의 상상력에나 맞을 상황에 지쳐버렸다. 그녀는 쇠칼이 몽상과 거리가 먼 것보다 더 심하게, 결코 몽상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 P147

소피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인생관이 정말로 정당한지 처음으로 의혹을 품게 했고,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줄수록 내 남자로서의 체면, 허영심은 더욱 견고해 졌다. 이 일의 희극적인 면은 소피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나의 냉정함과 거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처음 이리저리 마주치던 때에 그녀 앞에서 내 눈이 번득였다면, 그때 내 눈에서 찾을 수 없어 죽도록 고통스러워했던 그 눈빛 탓에 그녀는 겁에 질려 날 밀어냈을 것이다. - P149

겁을 먹고 순종하는 프란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자들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더 멀어졌다. 소피가 거만하고 짜증스럽게 아주 사소한 친절만 베풀어도 프란츠가 마치 설탕을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달려들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이 느껴진다. - P166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 P174

나는 감방의 죄수가 벽에 머리를 들이박듯이 그녀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 머리를 들이박았다. 나에게는 소피의 죽음보다 어떻게든 죽으려는 그녀의 고집이 더 끔찍했다. 나 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멋진 방도를 찾아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 능력에 대해 나는 아무런 환상 도 품고 있지 않았다. 소피가 죽으면 지나간 나의 젊음도 청산될 것이 고, 이 고장과 나 사이에 놓인 마지막 다리도 끊어질 것이다. 마침내 나는 그동안 내가 지켜보았던 죽음을, 마치 그 죽음이 소피의 처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그런 다음 인간이라는 상품이 얼마나 하찮은 값밖에 갖지 못하는지 생각하면서, 바르너 방적공장 복도에서 차갑게 식은 어느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해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을 내가 쓸데없이 유난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 P223

그녀는 조금 가쁜 숨을 내쉬 었고, 나는 콘라드가 죽어갈 때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주고 싶었듯이, 지금도 똑같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 폭죽을 터뜨리며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돌린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첫 발로 얼굴 한쪽이 날아갔고, 결국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번째 총알로 모든 게 완수되었다. - P225

처음에는 소피가 이 임무를 나에게 맡긴 것이 사랑의 마지막 증거라고,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그녀가 원한 것은 복수였음을, 나를 회한에 빠트리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계산은 정확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따금 회한에 젖는다. 여자들을 상대하면 언제나 덫 에 걸려들게 된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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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5-14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소설 작품을 자주 만나시는 것 같아요.
전 아픈 뒤로 책이 잘 안 읽혀지네요.ㅎ 휴식모드가 길어지니 집중이 잘 안됩니다.
천천히 리듬을 찾아야겠지요. 벌써 5월 절반이나 흘러갔네요.
이달에도 왕성한 독서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3-05-15 09:27   좋아요 2 | URL
제가 고전파라서 ㅋ

맞습니다. 아프거나 바쁘거나 고민이 많으면 잘 읽히더라구요 ㅜㅜ

빨리 리듬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