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책이 답이고, 하루키가 가장 정답이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하다.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 P11

그리고 그 말을 염두에 두고, 나라는 한 인간의 존재와 나라는 한 인간이 더듬어갈 길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같은 사고가 당연히 도달하게 되는 한 지점ㅡ즉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무척 막막한 작업이다. 그리고 죽음은 왜 그런지 내게 중국인을 떠올리게 한다. - P13

내가 보기에는 흔히 나오는 실수였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삐끗한 것이다. 누구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작은 균열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심연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밤바다에 천천히 가라앉는 배를 떠올리게 했다. - P23

"거짓말. 나랑 같이 있어봤자 즐거울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정말 실수를 한 거라고 해도, 그건 실은 네가 마음속으로 그러길 바랐기 때문이야." - P30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 P45

왜냐니, 나도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를 사로잡는 것은 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 P53

한번 생겨난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존재합니다. 기억과 마찬가지예요. 가령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잖아요. 그런 것과 같죠 - P67

"응. 말하자면 가난한 아주머니에게는 가난한 아주머니적인 소녀시대가 있고 청춘이 있었을 거야. 혹은 없었는지도 모르지.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세상에는 몇백만 가지의 결과를 위한 몇백만 가지의 이유가 넘쳐나 살아가기 위한 몇백만 가지의 이유, 죽기 위한 몇백만 가지의 이유,이유를 붙이기 위한 몇백만 가지의 이유. 그런 건 떨이로 파는 물건처럼 전화 한 통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찾는 건 그런 게 아니지?" - P72

그러나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저기, 무슨 급한 얘기야?" "안 급해." 나는 말했다. "딱히 급한 건 아니야. 나중에 해도 상관없어." 그렇다, 시간이라면 엄청나게 많다. 만 년이든 이만년이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 P81

"마치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우연히 함께 탄 느낌이야." - P88

하지만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바꿔 말하면, 모자에서 튀어나오건 보리밭에서 튀어나오건 토끼는 토끼일 뿐이다. 달궈진 아궁이는 달궈진 아궁이일 뿐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일 뿐이다. - P93

"새벽 세시에 인간은 온갖 생각이 드는 법이야. 이것저것 안가리고 누구든 그렇지. 그러니까 각자 대처법을 생각해놔야 해." - P98

"난 신청곡이라는 거 싫더라.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처럼 시작하는 순간 벌써 끝날때를 생각하게 돼." - P105

캥거루를 볼 때마다 과연 캥거루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항상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투박한 곳을 저런 묘한 꼴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부메랑 같은 엉성한 판자조각에 맞아 간단히 죽어버리는 걸까요. - P112

‘지금도 너를 정말 좋아해.‘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썼다. ‘다정다감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면 넌 괴롭겠지.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을 테니까. 열아홉 살이란 정말 싫은 나이야. 앞으로 몇 년쯤 지나면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몇 년쯤 지난 뒤에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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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tta 2023-02-0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숨이 트이는 작가가 있다는 건 좋군요. 저의 경우는 어떤 극에 달하면 카프카의 변신이나 단식술사를 읽게 되는데 그러면 좀 환기가 되더군요. 1월의 일력 카뮈의 문장들이 끝이 났군요 마지막 날의 단어들이 어마합니다 운명 숙명 경멸. 1월이 성큼 지나버렸네요 2월의 작가는 누구일지요. 밀려서 쓰신 거 무지 티납니다~

새파랑 2023-02-02 11:49   좋아요 1 | URL
ㅋㅋ 밀려서 쓴거 티나나요? ㅋ
카프카의 단식술사 한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2월은 제가 아주아주 흡모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입니다 ^^

서니데이 2023-02-03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선생 책이군요. 이 책도 나온지 몇 년 되었지만, 이전의 표지가 생각나서 그런지 얼마 전에 나온 신간 같아요. 최근에 하루키 선생의 신간 알림을 받았는데, 이전에 나온 책이 다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이전의 책들이 다시 나오지 않으면 너무 오래되어서 절판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파랑님,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따뜻한 주말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새파랑 2023-02-04 10:19   좋아요 1 | URL
네 이 책도 나름 최근 개정판입니다 ㅋ 하루키의 신규 장편이 나온다는 소식을 본거 같기도 한데 ㅎㅎ 주말에 출장가서 정신이 없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