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연휴 첫날을 따뜻하게 해준 작품.








부모님 댁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려 애쓰다 떠오르는 대로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정확한 번호는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 꿈은, 두 분이 스무 해를 사셨던,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 아파트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린 현재의 상황과 일치한다. 하지만 꿈속의 내가 잊고 있는 건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스물다섯 해 전에, 어머니는 그후 십 년이 지났을 때돌아가셨다. - P13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단다. 존 너는 너무 잘 잊어버려. 이걸 알아야 해. 죽은 사람은 몸이 묻힌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 P13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 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 P16

사람들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위험을 통제하려 들지. 그러니까 전에 통제됐었던 위험들을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너를 그냥 혼자 놔뒀어.

혼자라서 외로웠어요.

그건 정말 의외로구나, 얘야. 너는 자유로웠어.

모든 게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요.

당연하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니? 두려움이 없거나 자유롭거나 둘 중의 하나지, 둘 다일 수는 없어. - P30

미덕만으로 살아가는 건, 세네카가 지혜라고 칭했던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건 위험한 일이야. 어머닌 말을 뭉개듯 씹으며 말했다. 설사 그게 진정한 미덕이라고 해도 그건 위험해. 술처럼 중독이 되거든, 내가 직접 겪은 일이야. - P35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어.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 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 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 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랐어. 그러니까 읽지 않은 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창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 P50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ㅡ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 P59

우리 -우리 말이야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 P59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십오년 동안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면 자식들의 시간은 두 배로 빨라지거나 가속이 붙을 때가 많다. - P62

어머니는 첫번째 석등에서 쏟아지는 빛의 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양쪽 송수관 수면에 반사되는 빛이 그 물에 띄운 초처럼 출렁거렸다. 어머니가 금빛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커튼처럼 어머니의 몸을 가렸고, 빛 밖으로 다시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 때문에 몸은 더 작아졌다. 걸음걸이는 점점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멀어질수록 더 활기차졌다. 어머니는 그 다음 금색 커튼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나왔을 땐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숙여 어머니를 따라 흐르는 물속에 손을 담갔다. - P63

제네바는 살아 숨쉬는 사람만큼이나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도시다. 이 도시의 신분증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국적: 중립. 성별: 여성. 나이: (신중함이 개입되는 항목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임. 혼인 여부: 별거. 직업: 옵서버. 신체적 특징: 근시로 인해 약간 구부정한 자세, 비고: 섹시하고 신비로움. - P65

우리 사이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책을 통해 배운다―또는 배우려 한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 그 과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그림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 P93

책을 돌려줄 때면 그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많았다. - P93

사냥을 하는 쪽이든 사냥을 당하는 쪽이든 생존의 전제조건은 잘 숨는 것이다. 목숨은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달렸다. 모든 것이 숨는다. 사라진 것은 숨어 버린 것이다. 빈자리 - 죽은 이의 부재처럼 - 는 버림받은 느낌이 아닌 상실의 느낌을 안겨 준다. 죽은 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 P141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P161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 P224

왜 제 책을 하나도 안 읽으셨어요?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 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어.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 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 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 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 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랐어. 그러니까 읽지 않은 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문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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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1-21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도, 존 버거의 글도, 까뮈의 글귀도 다 좋네요.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파랑 2023-01-21 23:21   좋아요 1 | URL
이 책 오늘 다 읽었는데 완전 좋네요 ㅋ 꼬마요정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2023-01-22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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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1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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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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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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