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평소대로라면 인간과 짐승이 난폭하게 서로를 덮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난 이렇게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손바닥을 당신에게 향한 채, 사려는 사람을 마주한 팔려는 사람의 겸손함으로, 욕망하는 사람을 마주한 소유한 사람의 겸손함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치 황혼 녘에 건물 위의 창문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듯, 나는 당신의 욕망을 봅니다. 황혼이 이 첫 번째 불빛에 부드럽고 공손하게, 그리고 다정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다가가듯, 저 아래 거리에서 인간과 짐승이 서로의 줄을 잡아당기고 거칠게 이빨을 드러내도록 내버려둔 채, 나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 P10
똑같은 추위나 똑같은 더위, 혹은 똑같은 부드러운 뒤섞임이 지배하는 대지 위를 걷는 사람에게는 부당함이란 없겠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사람 혹은 동물은 서로 동등합니다. - P12
유일하게 존재하는 경계란 사는 자와 파는 자 사이의 경계뿐이지만, 이 둘의 욕망과 그 대상은 모두 들쑥날쑥하기에 그저 불확실할 뿐입니다. 그래도 인간이나 동물들 사이에서 암컷이나 수컷으로 구분되는 것보다는 덜 부당하지요. 내가 잠시 겸손함을 가장하고 당신에게 거만함을 건네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당신과 내게 어쩔 수 없이 똑같이 주어진 이 시간에, 당신과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란 말이지요. - P13
나의 욕망으로 말하자면, 내가 이런 황혼의 어둠 속에서, 꼬리조차도 보이지 않는 동물들이 으르렁거리는 이곳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욕망이 있기나 한 걸까요. 당신이 겸손함을 내던지고, 내게 거만함이라는 선물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확실한 욕망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난 거만함에 대해서는 일종의 약점을 갖고 있는 데다가, 겸손함은 내 것이건 남의 것이건 증오하기까지 하거든요. - P17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은 절대 가질 수 없을 겁니다 - P18
그리고 내가 출발한 지점에서 내가 가려는 지점까지를 이어주는 직선이 어떤 이유로도 갑자기 휘어질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켜선 이유는, 당신이 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 P23
내가 당신에게 베푸는 그리고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필요하긴 하지만 근거는 없는 이런 예의를 갖추는 까닭은 마치 장화로 기름종이를 뭉개버리듯 내가 당신을 거만하게 짓밟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P27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회상에 젖고, 땅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슬퍼집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과 그 무엇을 갖지조차 못했음을 회상하는 것은 모두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 P28
모든 장사꾼들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욕망까지도 만족시켜 주려고 애쓰는 반면, 손님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제안하는 것을 언제든지 거절할 수 있다는 데서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곤 하니까요. 그가 밝히지 않은 욕망은 이렇듯 거절에 의해 더욱 고무되고, 장사꾼을 모욕하는 데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 P36
내가 여기 있는 건 욕망의 심연을 메우고, 욕망을 일깨우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 지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니까요. - P37
모든 인간이나 짐승들이 두려워하는 건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은 측정할 수 있고, 고통을 가하고 참아내는 능력 또한 측정 가능한 것이니까요. 인간과 짐승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건 고통의 낯설음이고, 그 익숙지 않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 P38
사람이란 스스로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을 가하고, 또 자신이 가할 수 없는 고통만을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 P39
이곳에 익숙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고 나는 여기서 이방인일 뿐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도 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도 나지요. 난 당신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고 다만 어둠 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추측할 뿐입니다. 뭔가를 알아맞히고 이름 붙여야 할 사람은 당신입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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