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좋다.






갈수록 흐려져 가는 기억을 상상으로 메워나가면서 사진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고귀한 여인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 P14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얼굴을 보고 가엾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눈이 잘 보이는 우리가 스승님보다 더 비참하다. 스승님께서 그 기상과 기량으로 무엇이 아쉬워 다른 이의 동정을 구하겠는가? 오히려 ‘사스케가 불쌍해’라고 하시며 나를 가여워하셨다. 나나 너희는 눈, 코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스승님께 미치지 못한다. 그런 우리들이야말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P24

이처럼 슌킨은 고집도 세고 제멋대로였지만 다른 고용인들에게는 심술궂게 행동하지 않았다. 유난히 사스케를 대할 때만 그녀의 심술이 심해졌는데 원래 그런 기질이 있는 데다 사스케만이 애써 비위를 맞추려 했기에 그를 가장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스케 또한 고달프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필시 그녀의 유난스러운 심술을 응석으로 여기며 일종의 은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 P29

이때부터 사스케는 슌킨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작은아씨‘라고 불러도 괜찮았지만 수업시간에는 반드시 ‘스승님‘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슌킨 역시 호칭을 붙이지 않고 ‘사스케‘라고 불렀는데, 이는 모두 검교 슌쇼가 제자를 대하는 모습을 흉내 낸 것으로 엄격하게 스승과 제자의 예를 갖추게 했다. - P39

오늘날 진정 그것이 사실인지 단정하기는 어렵겠으나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소꿉놀이를 할 때 아이는 반드시 어른을 흉내 낸다는 점이다. 슌킨은 검교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여태껏 직접 매를 맞아 본 적은 없었지만 평소 스승 슌쇼의 독특한 방식을 보아 왔기에 어린 마음에 무릇 스승이란 그렇게 하는 거라고 수긍했을 것이다. 놀이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스승의 흉내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으니 그런 성향이 심해져 습관이 되었을 터다. - P44

"사스케, 너는 어찌 그리 기개가 없느냐. 사내자식이 참을성도 없어 툭하면 우는 주제에 그 소리가 너무 크니 도리어 내가 야단맞지 않느냐! 예술에 정진하고자 한다면 뼈와 살이 고통으로 아린다 한들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야 하느니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는 스승을 그만둘 것이야!"

오히려 이리 쏘아붙이니 그 이후로 사스케는 괴로워도
절대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 P48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이라는 말인가! 그로부터 수십 일이 지나 사스케 역시 백내장을 앓았고, 순식간에 두 눈이 모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점차 눈앞이 희미해져 물건의 형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 사스케는 손의 감각만으로 더듬거리며 슌킨 앞으로 가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스승님! 소인 사스케, 실명했사옵니다. 앞으로 평생 동안 스승님의 상처는 못 보게 되었사옵니다. 참으로 좋은시기에 실명하였나이다. 이는 필시 하늘의 뜻일 것이옵니다!"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슌킨은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 P92

"스승님! 저도 맹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평생 스승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P97

지금까지 육체적 관계는 있었지만 사제지간이라는 연유로 가로막혀 있던 서로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로 어우러지며 함께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P98

‘아아! 이것이 진정 스승님이 살고 계신 세상이구나! 이제 비로소 스승님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 P98

사스케의 쇠약해진 시력으로는 방의 모양새는 물론이거니와 슌킨의 모습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붕대를 감은 그녀의 얼굴만은 희미하게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사스케에게는 그것이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달 전 슌킨의 그 얼굴, 신비로운 하얀 살갗에 둥그스름한 그 형태가 마치 몽롱한 빛 속의 석가여래 모습처럼 떠올랐다. - P99

"기특하게도 그런 결심을 해 주다니 내 마음이 기쁘구나. 대체 누구의 원한을 사서 이 지경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야 내 진심을 털어놓자면 다른 사람에게는 지금의 모습을 보여 줄지라도 네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용하게 잘 헤아려 주었구나." - P101

신께서 다시 앞을 보게 해 주신다고 해도 거절했을 게야. 스승님과 나는 맹인이었기에 앞이 보이는 사람이 모르는 행복을 맛볼 수가 있었단다. - P109

사람은 기억을 잃지않는 한 꿈을 통해 죽은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이를 꿈으로만 보았던 사스케는 어떠했을까?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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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2-06-14 1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작년 6월에 원서로 읽었는데 엄청 좋았어요. 인용 문장 보니 새록새록합니다.
이런 사랑과 존경이 있을까 싶어요.
오늘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2-06-14 13:47   좋아요 3 | URL
예상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ㅋ 역시 일본어 천재 모나리자님~!!!
즐거운 하루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