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어쩌면 자식이 줄줄이 셋이나 딸린 홀아비로 남겨져 세상 풍파를 잘 헤쳐왔다는 것에 뿌듯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감정은 뿌듯함이 아니라 그저 피곤함이다. 뿌듯함은 이삼십대에나 느끼는 감정이다. - P13
다른 길이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삶을 헤쳐왔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기에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언제나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 - P13
"지금 당신 문제가 뭔지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야." - P15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더는 이런 식으로 한다리 건너 그녀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지금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듯 솜털까지 생생한 그녀와 직접 마주하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초록빛 눈은 기억나지만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녀의 눈길은 느낄 수 없다. - P18
만약 정말 어디엔가 그녀가 있다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요컨대, 기억이 중요하긴 한가? "그리워하면서도 뭘 그리워하는지 모르는 제가 가끔은 한심해요." - P20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남들처럼 악수를 청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나와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 그리고 그의 가족과 심지어 우리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은 진심 어린 위로를 표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돌아가신 어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친 내게 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일은 단지 사소한 일화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슬픔으로 인해 극도로 민감해진 순간에는 그런 사소한 일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 P50
기쁠 때도먹고, 괴로울 때도 먹고, 놀랐을 때도 먹고, 낙담했을 때도 먹고, 우리의 감성은 근본적으로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민주주의자인 이유는 옛적부터 ‘모든 인간은 먹어야 한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회개기도는 대충대충 하지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눈물을 글썽이며 무릎을 꿇고 한다. 확신컨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상징으로서의 ‘빵‘이 아니라 저울에 달아 파는 독일 빵 한덩이다. - P63
한동안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류 더미 앞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일렁였던 것 같다. 호흡이 가빠졌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흔히 울고 있는 여자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여자를 봤을 때 드는 긴장감이 아니었다. 나의 불안감은 나의 것,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나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는 불안, 그 순간 한줄기 빛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난 메마르지 않았어! - P67
20년 전 이사벨이 죽었을 때, 내 모든 감정은 작동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고통, 다음에는 무관심, 그뒤에는 자유가 잇따랐고 결국에는 권태만이 남았다. 길고, 황량하고, 한결같은 권태. 아, 이런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도 성생활은 유지해왔지. - P68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위기들 중 하나가 당신 때문이란 걸 알고 있나요?" 여전히 웃으며 그녀가 물었다. "재정적인 위기인가요?" 내가 대답했다. "아니, 감정적인 위기." - P83
"내 나이나 아베야네다양의 나이를 생각하면 내가 입을 다물어야 마땅하겠지만,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게요 만약 당신이 지금이나 내일 아니면 언제든 그만하라고 하면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좋은 동료로 지내면 돼요. 회사 업무나 직장에서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니 걱정 마요." - P84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커피마시러 온걸요." - P84
"물론 내가 행복해지거나 혹은 최대한 행복에 가까워지길 원하는 건 당연하지만 결국에는 당신도 행복해지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렵네요. 당신은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반대로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잖아요." - P88
언젠가 아베야네다도 그런 식으로 나를 잊게 될까? 참 아이러니하다. 잊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것, 적어도 ‘기억하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 P97
우리의 경우 미래에 명암이 서로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완벽해질수록 나의 장점은 사라져간다. 또 그녀의 결점이 줄어들수록 내게는 결점만 남을 것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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