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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평점 :
N22065
˝아름다움에 무슨 내용이 필요한가! 순수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무의미하고 무도덕적인 것이다.˝
내면의 바탕이 고독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잠깐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평소에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내면을 숨기기 위해, 내면을 극복하기 위해 지나치게 활달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를 읽고 그런 사람이 떠올랐다. 다지이 오사무 역시 밝게 써보자고 마음먹고 글을 썼지만 고독을 숨길 수 없었던 작품집이 <달려라 메로스>가 아닐까 한다. <인간실격>, <사양> 처럼 완전 어둡지는 않고, 오히려 <만년>, <쓰가루>와 가까운, 좀 밝은 고독이 작품속에 골고루 담겨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작품에서 자전적인 내용을 많이 다루는데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귀향>, <동경팔경>, <후지산 백경>, <고향> 역시 자전적인 느낌이 대단히 강한 작품들이다.
[나는 십 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다. 쓸쓸한 땅이었다. 동토의 느낌조차 들었다. 매년 지하 깊숙한 곳까지 얼기 때문에 흙은 부풀어올라 황량해진다. 집도, 나무도, 흙도 바랜 느낌이다. 길은 하얗게 메말라 있어 걸어도 발바닥에는 아무 느낌이 없다. 너무 메마른 느낌이다.] P.34 귀향
특히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불안정한 감정과 작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 자신의 문제로 인한 가족에게의 피해, 가족에게의 경제적인 의존 때문인지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이 대단히 크다. 그래서 작품속에어 자신의 열등성을 자주 보이는데 이 단편집에도 그런 부분이 많다.
[많은 육친들 가운데 나 혼자만이 비열하고 가난한 근성을 지닌, 열등하고 보기 흉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P.36 귀향
자전적인 이야기 이외에도 <유다의 고백>, <달려라 메로스>처럼 성서나 신화를 모티프로 해서 다자이 오사무가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은 왠지 그답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좋았다. 특히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메로스, 그러면서도 한순간 갈등에 휩싸이기도 하는 메로스를 보면서 나약하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했던 다자이 오사무가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있어 나의 이 진심 어린 사랑을 제대로 이해해줄 것인가. 아니,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지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기 위한 얄팍한 사랑이 아니다. 나는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사겠지. 그러나 이 순수한 사랑의 욕심 앞에서는 어떤 형벌도, 어떤 지옥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P.105 유다의 고백
[˝그러니까 달리는 것이다. 믿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 늦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목숨도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엄청나게 큰 무언가를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P.234 달려라 메로스
하지만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여학생으로 빙의하여 써내려간 <여학생> 이란 작품이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감성이었을까? 겉으로는 발랄하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도 남들과 다른 엉뚱함을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 밝아서 더 슬프게 느껴졌다.
[여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하다. 정말 놀랍도록 무서운 일이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P.171 여학생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며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꽃을 사랑할 수 있다니 인간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75 여학생
어떤 작가의 대단한 작품을 읽고나면 ˝와,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하고 감탄을 하는데, 또 어떤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을 읽고나면 ˝도대체 이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하는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다자이 오사무는 후자에 딱 맞는 작가다. 저렇게 예민해서, 저렇게 약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대작가의 걱정을 한다는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만...)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더 애정이 가는 것 같다. 다른 분들에게 추천하기는 좀 꺼려지지만 나에게는 너무 좋았던 작품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