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이 백지장을 열광적으로 칭찬하는 동안 제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손톱으로 오직 그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소장가 표식을 밀리미터까지 짚어서 가리키는 것을 보자니 섬뜩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말문이 막혔고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쩔 줄 모르며 두 여인을 보니 노부인은 두려움에 떨며 다시금 애원하듯이 양손을 치켜들고 있더군요. 그래서 저는 마음을 다지고 제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했습니다. - P254
하지만 제가 얻은 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기쁨이 없는 암울한 시대에 다시금 순수한 열광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오로지 예술에 몰입하여 도취할 수 있는 해맑은 정신, 그런 것을 우리 인간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 P259
사람들은 대부분 상상력이 빈약하다. 어떤 것이 눈앞에서 감동을 주거나, 그들의 감각 속으로 집요하게 뾰족한 쐐기를 박아 넣는 경우가 아니라면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을 뻗치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사람들은 곧 지나치게 열을 올리곤 한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과장되게 격렬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습관화된 무관심을 보상하려 든다. - P263
개인적으로 저는 인간을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을 더 즐깁니다. - P273
마치 제가 기적을 이루고 성녀로 추앙받은 것처럼 신의 은총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으로부터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이 생겨났기에 이 두 순간은 쌍둥이 자매와도 같았습니다. - P313
그가 이 모든 일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열정을 담아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외려 열병에 걸린 환자의 기록처럼 여겨졌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P319
그 순간 저는 최고로 대담한 일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아끼고 쌓아 두었던 제 삶 모두를 단번에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제 앞에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장벽이 나타나는 바람에 저의 정열은 그 장벽에 이마를 부딪치고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 P335
하지만 당장 제가 떠올린 건 한마디 말뿐이었습니다. 떠나자! 떠나자! 떠나자! 이말은 끊임없이 쿵쾅대고 꿈틀대며 메아리쳤습니다. - P344
그러나 결국, 시간은 심오한 힘을 지니고, 나이는 온갖 감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희한한 위력을 행사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고 죽음의 그림자가 검게 길 위에 드리운 것을 본 사람에게는 지난 일들이 그다지 끔찍하게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지난 일들은 더는 내부의 감각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게 되고 위협적인 힘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서서히 저는 그 충격을 극복해나갔습니다. - P346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P347
한번 마음에 담았던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강박관념과 끊임없이 그때를 회상하는 증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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