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돌아가라고 말하지 말아줘요." 그녀가 속삭였다. 너무 힘없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라 무슨 말이 있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 P183
"라하단을 떠나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허영의 시장‘을 다 읽기 전에는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다 읽으면 우린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것도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 P187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 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 P187
"떠나면 보고 싶을 거예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P188
"사랑해, 루시." 그때 레이프가 말했다.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렸다가 잠시 후에 말했다. "응, 나도 알아." 그녀는 다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서로 사랑하는 건"
"왜 소용이 없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못 돼."
"오, 루시, 되고말고! 네가 정말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란걸 스스로 알면 얼마나 좋을까!" - P189
"너는 나를 잊게 될 거야, 올여름도 잊을 거야. 나는 희미해지다 그림자가 되고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 들리지도 않게 될 거야. 지금은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 현재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이건 지속되지 않을 거고, 지속될 수도 없는 현실이야." - P196
이틀 뒤 레이프는 떠났다. 헨리가 에니실라 역까지 2륜마차로 데려다주었다. 루시는 그들과 함께 갈 수도 있었고, 기차가 레이프를 싣고 떠나는 동안 역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고 서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대신 현관문에서, 이어 진입로에서 손만 흔들었다. - P205
그들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이 입고 있는 드레스만큼이나 하얘졌고, 그 순간 그는 딸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 P256
그러나 회한과 후회와 관련하여 그가 한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대위는 뭔가 해소되지 않은 것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딸의 음울한 세월은 그 나름의 뭔가를 만들어내 오래전에 딸아이를 사로잡고, 한기를 느끼게 하는 안개처럼 딸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 P260
지금 이 순간 루시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매일 아침 또 하루가 밝아오는 어스름에 눈을 뜰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 그가 무엇을 할지 알고 어떤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 - P274
베개에 머리를 받친 채 대위는 딸의 발걸음을 찾아 귀를 기울이다가 그 소리가 자신의 방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들었다. 밤에 잠시 그는 무덤들을 깔끔하게 손본 것이 기뻤다. 얼마뒤에 그는 통증을 의식했다. 그러나 통증이 그를 깨우지는 않았다. - P333
숲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서 있는 목재만 남는다. 바다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짠물만 남는다. - P374
그녀는 어렸을 때 죽었어야 했다. 그녀는 그것을 알지만 수녀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몇 년처럼 느껴지던 며칠 동안 무너진 돌 사이에 누워 있던 자신의 이야기에도 포함한 적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했다면 그들의 기분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분은 고양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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