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스타킹 한 켤레 - 19, 20세기 영미 여성 작가 단편선
세라 오언 주잇 외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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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04

 

"어쨌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다들 잘 모르고 사니까요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여러작가의 단편 모음집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읽고 나서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싶은데 더 이상 읽을 작품이 당장 없다면 왠지 아쉬울것 같아서이다. 이번에 내가 읽은 <실크 스타킹 한 켤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좋은데, 짧은 단편 하나만 읽고 끝내야 한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 책에는 19/20세기 영미 여성작가 10명의 단편들이 한 편씩 실려있다.

 

10명의 작가 중 "윌라 캐더", "이디스 워튼",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은 읽어본 적이 있지만 단편은 처음 접했고, 이 책에 실린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고한 대령의 딸들>은 그녀의 다른 단편집에서 이미 읽은 작품이었다. 다른 6명의 작가는 처음 접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출판사에서 엄선된 단편들을 선정해서 그런가 보다.

 

 

이중에서 인상적인 두 작품을 선정해 보자면 "세라 오언 주잇"의 <백로>와 "케이트 쇼팽"의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였다.

 

 

 

1. 백로

 

 

뉴잉글랜드의 한적한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실비아", 그녀는 늙은 암소 한마리를 키우면서 그곳의 자연과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숲속에서 젊은 사냥꾼을 만나게 되는데,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던 그녀는 사낭꾼에게 처음에는 경계심을 느꼈지만 점점 호기심을 가진다.

 

[아이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여자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꿈으로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 위대한 힘의 어떤 예감이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가만 숭고한 삼림을 가로지르는 젊은 두 사람의 마음을 휘저으며 뒤흔들었다.]  P.29

 

 

샤냥꾼은 소녀의 집에 잠시 머물면서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백로를 사냥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사냥한 백로는 박제를 할거라고 하면서 백로의 둥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냥꾼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백로 둥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면 10달러를 주겠다고 한다. 백로가 대략적으로 어디있는지 알고 있었던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은 밤에 10달러로 살 수 있는 것들을 헤아리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날 "실비아"는 사냥꾼과 함께 백로를 찾아 나서는데, 그와 함께 할수록 설레임을 느낀다. 하지만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그녀는 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레임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자연과 함께 살아왔던 그녀가 사냥꾼에게 백로의 서식지를 찾게 해주는게 괜찮은 걸까?

["이 따분하고 보잘것없는 삶에 처음으로 밀려온 인간적 관심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자연과 말없는 삼림에 가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삶의 만족감을 휩쓸어가야 하는 것인가!"]  P.31

 

 

다음날 그녀는 혼자서 집을 빠져나와 백로 둥지를 찾기 위해 반마일 떨어진 숲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큰 소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무도 잘 타는 "실비아"였던 것이다. 그녀는 가장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지냈던 곳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백로가 날아가는 모습과 둥지의 위치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소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기 전과 180도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 저기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가 있고, 그 장엄한 동쪽을향해 매 두 마리가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을 때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까마득히 높이 뜬 검은 점 같았는데 이 높은 곳에서 보니 얼마나 낮아 보이는지.]  P.32

 

 

[그녀가 놓친 보물이 무엇이든 숲과 여름이여 기억해주렴! 이 외로운 시골 소녀에게 선물과 은혜를 가져다주고 너희들의 비밀을 말해주렴.]  P.35

 

 

소나무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온 "실비아"는 백로 둥지의 위치를 결국 말하지 않는다. 백로의 생명을 뺴앗을 수 없었던 그녀. 실망한 사냥꾼은 다음날 그녀의 집을 떠나고, 그녀의 설레였던 마음은 이제 길을 잃었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2.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어느날 기대하지 않았던 15달러를 손에 쥐게 된 "서머스 부인"은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한다.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일 없이 오직 가족을 위해만 온 생각을 집중해서 살았던 그녀는 이 돈을 가족들의 물건을 사기 위해 쓰기로 결심하고 할인행사장에 간다.

[그녀 자신은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불건전한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 빠져 있을 시간이라고는 일분일초도 없었다. 지금 사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미래가 흐릿하고 수척한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간혹 질겁하는 일은 있었지만, 다행히 내일은 오지 않았다.]  P.115

 

 

하지만 할인행사장에서 우연히 반짝이는'실크 스타킹'을 보게 되고, 그녀는 무엇에 홀렸는지 '실크 스타킹'을 사게 된다. 그리고 구속진 곳으로 가서 그녀가 신고 있던 '면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새로 산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입니다. 사리를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그녀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갈아입자 그녀는 왠지 모를 변화를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서머스 부인은 할인 행사 매대로 가지 않았다. 승강기를 타고 여성 휴게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의 구석진 곳으로 가서 면 스타킹을 벗고 방금 산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신었다. 그녀의 예리한 정신이 작동하지도 않았고, 사리를 따져보거나 그러한 행동의 동기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고되고 피곤한 작용에서 벗어나, 그녀의 행위를 지휘하며 그녀의 책임을 덜어주는 어떤 기계적인 충동에 몸을 맡겼다.]  P.117

 

 

 

이후 그녀는 가족을 위한 물건을 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싶던 신발, 장갑, 책들을 산다. 그리고 혼자 식당으로 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서 먹고, 식후에는 혼자서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본다. 지금까지 그녀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탈 아닌 일달. 연극이 끝나고 이제 꿈에서 깨어나 집으로 가야 하지만 그녀는 이 꿈이 깨지 않기를,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연극은 끝났고, 음악도 멈췄고, 관객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P.120

 

[전차 건너편에 앉은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그녀의 창백한 작은 열굴을 관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본 것을 해독하지 못해 당황스러워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전차가 아무데도 결코 멈추는 일 없이 그저 계속해서 한없이 자신을 태우고 가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애끓는 소망, 강렬한 갈망을 알아챌 수 있을 마술사가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P.120

 

 

'실크 스타킹' 하나로 인해 소박한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서머스 부인", 여성이라고, 어머니라고 해서 항상 삶에 억눌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지 강요가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전차를 타고 돌아가더라도, 다시 그리고 자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생각해보면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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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작품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메리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는 결혼을 통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느니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비혼주의 여성의 선구자적인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고, "윌라 캐더"의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는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남자보다 더 확실하게 일을 하고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강한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

 

 

"수전 글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과 "엘런 글래스고"의 <제 3의 그림자 인물>. "조라 닐 허스턴"의 <땀>은 폭력적이고 계산적이며 개차판인 가해자 남편에 대한 피해자 여성의 복수를 그리고 있다.

 

 

"샬런 퍼킨스"의 <누런 벽지>와 "버지니아 울프"의 <벽의 자국>은 모두 벽(벽지)를 소재로 하여 이를 바라보는 여성의 복잡한 심리와 억압된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나의 짧은 독서력으로는 두 작품이 가장 난해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멋진 리뷰를 써주실 거라 믿는다.

[일단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결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아, 세상에! 삶은 어찌나 불가사의한지! 사고는 어찌나 불확실한지! 인류는 어찌나 무지한지! 한평생 살면서 상실하는 것들을 몇 가지만 떠올려봐도, 우리가 가진 것조차 얼마나 마음대로 하기 힘든지,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삶이란 결국 얼마나 우연적인지 알 수 있다.]  P.210 (버지니아 울프, 벽의 자국)

 

 

 

두껍지 않은 책이었지만 한번에 10명의 작가의 훌륭한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당시 여성들이 경험했던 갈등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여기에 실린 여성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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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1-08 16: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밑줄 담으신걸 보니 사놓길 잘했더라구요. 여러 작가들의 단편인만큼 다양한 개성이 우러나있을것 같아요 특히 복수하는내용 기대되네요!^^*

새파랑 2022-01-08 16:33   좋아요 4 | URL
컴퓨터로 리뷰는 처음 써보는데 (페이퍼는 한번 써봤어요ㅎㅎ) 쓰기가 어렵네요 ㅜㅜ 거기서 쓰고 북플에서 보면 다르게 뜨더라구요 ㅋ

모든 작품에 밑줄이 있지만 모든 작품 다 쓰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두개만 썼어요 ㅋ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극적인 복수라기 보다는 잔잔한 복수여서 강렬한 미미님께 잘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

페넬로페 2022-01-08 17: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실크 스타킹 한켤레‘, 내용 너무 공감되고 좋은데요. 주부라면 자신에게 돈 쓰기가 사실 쉽지 않거든요^^
식구들 똑같이 재난지원금 받아도 저는 맛있는 고기나 영양제 같은걸 사니까요.
아, 저 너무 착한것 같아요 ㅎㅎ
‘벽의 자국‘과 ‘뉴잉글랜드 수녀‘는 읽어봤는데 단편도 나름의 임팩트가 있어 좋았어요^^

새파랑 2022-01-08 18:32   좋아요 3 | URL
역시 착한 페넬로페님~!! 전 <실크 스타킹 한 컬레> 읽고 바로 ˝케이트 쇼팽˝ 책 구매했어요 ^^ 이 책 단편들은 다 재미있네요~!!

mini74 2022-01-08 17: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실비이에게 10달러는 큰 돈이었을것 같은데요. 서머스 부인의 모습ㅎㅎ 표현이 멈 좋은데요. 이 책도 찜. ㅠㅠ 언제 다 읽지요 ㅎㅎ

새파랑 2022-01-08 18:33   좋아요 3 | URL
10달러는 저에게도 큰 돈~!! 책 한권 살 수 있겠죠? ㅋ 미니님도 기계 쪽이시니까 금방 읽으실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