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단편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너무 좋았다.

"하느님이 저한테 그런 껍집을 입히신 게 제 죄일까요? 당신한테 수염이 있는 게 당신 죄라면 뭐 이것도 제 죄겠죠. 바이올린은 자기 케이스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법이죠. 전 자신을 아주 사랑하지만, 누군가 저한테 제가 여자란 사실을 상기시키면 그때부턴 스스로를 증오하게 돼요."
(그렇게 태어난 걸 누구에게 탓할 수 있을까) - P28
‘맨 정신인 사람은 역겹지만 취한 사람의 영혼은 기뻐 노래하는 곳이 있는 법이지." - P48
"그래, 아주 좋군! 중위는 설계도를 그리고, 자네는 종일 부엌에 앉아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거지...설계도라고...중요한 건 설계도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고! 인생은 돌아오지 않으니 소중히 여겨야 한단 말이야." - P58
이 시간, 저 위에서는 해 지는 곳에 구름이 모여든다. 어떤 구름은 개선문처럼, 어떤 구름은 사자처럼, 또 다른 구름은 가위처럼 보인다...구름 사이로 거대한 녹색 빛이 비치더니 하늘 한 가운데까지 번진다. 잠시 후 그 빛과 나란히 보랏빛, 금빛, 장밋및 줄기가 내리비친다...하늘은 부드러운 라일락 빛을 띠고 있다. 이 위대하고 매혹적인 하느을 바라보며 대양은 처음에는 얼굴을 찌푸린다. 하지만 곧 그 자신도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기쁨에 넘치는 빛깔을 띠어간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은 저런걸까...) - P73
하지만 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왠일인지 몸도 좋지 않았다. 그는 뜨겁고 가쁜 숨을 내쉬었고, 다리의 힘이 풀렸으며, 계속 갈증이 일었다. 평생 단 한번도 마르파를 불쌍히 여기거나 소중히 대해 주지 않았다는 생각도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 P136
앞을 보면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뒤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손해, 소름이 끼칠 만큼 끔찍한 손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 인간은 이런 상실과 손해 없이는 살지 못하는 걸까? - P140
인간은 삶에서는 손해만을, 죽음에서는 이익만을 얻는 것이다. 물론 온당하지만, 어쨋든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생각이다. 도대체 왜 이 세상에는 단 한번 주어진 인생이 아무런 유익 없이 흘러간다는, 이토록 이상한 질서가 존재하는 걸까? - P141
이 세상에는 스스로에게 만족한 행복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건 얼마나 억압적인 힘인가!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보세요. 힘 있는 자들의 뻔뻔함과 게으름, 약한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 주위를 가득 채운 상상하기도 힘든 가난, 비좁음, 장애, 방탕, 위선, 거짓...그런데도 모든 집과 거리는 고요하고 평온하죠. 도시에 사는 5만 인구 중 단 한명도 이런 현실 때문에 비명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흥분하지 않으니까요. - P182
그러면서 끊임없이 왜 그녀가 나 아닌 그 사람을 만났는지,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삶에 이런 끔찍한 실수가 일어났는지 이해하려 발버둥쳤습니다. - P198
그녀의 사랑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런 일 없이도 힘들고 온갖 불행으로 가득 찬 내 삶을 그녀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가, 하는 질문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 P199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끝나고 맙니다. 우리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 P201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 P202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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