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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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는 순간 제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아… 참 좋다.” 였습니다. 9년 만에 출간된 정이현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이었는데요, 긴 시간을 거쳐 나온 책인 만큼 그 안에는 코로나, 딥페이크 범죄, 연애 예능 프로그램 등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우리나라에 어떤 사회적 이슈들이 있었고 지금은 또 어떤 문제점들을 당면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사회적인 소설집이면서도, 그 안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다루는 문학성 또한 놓치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극복하고 넘어서고 미래를 기약하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굳이 안 그러고 싶은 실패도 있으니까. 그냥 실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삶의 일부로 남은 실패. (…)” (26p)

소재가 독특해서 좋았던 「실패담 크루」였습니다. 지금 현재 사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실패’를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이를 어떻게든 통과해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계발서의 저자들 혹은 그런 계열의 유튜브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자신이 겪은 어떤 실패담을 들려주지만, 결국 어디까지나 ‘과거’에 해당하고 지금은 그로부터 빠져나온 일화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실패라는 게 마치 ‘뗄감’처럼 소비되는 것 같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실패담 크루」는 그런 경향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실패란 꼭 극복하고 넘어서야만 하는 건 아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 실패도 있지 않는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인지 위에 적은 저 한 문장이 특히 제게 위로를 주었던 것 같아요.

「이모에 관하여」라는 작품도 인상 깊었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의도치 않게 둘째를 임신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한국인 베이비시터는 신생아가 있는 집에서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은 울며 겨자먹기로 조선족 시터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쎄-한 기운을 감지하죠.

그녀가 첫날 일터에 맨발로 온 것은 사소한 부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 한 면을 가지고 사람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재연은 자꾸자꾸 맨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난처하고 낯설었다. (285p)

그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주인공은 그녀를 자르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데요. 그냥 대놓고 말하면 될 것을, 극한의 ‘회피형 인간’인 주인공은 눈치 더럽게 없는 남편과 함께 연극을 벌여가며 결국 조선족 시터를 그만두게 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인공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거나 불쾌했다기보다는, 저의 모습이 비쳐 보였던 것 같아요. 저도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는 ‘피할 수 있을 때까진 피해라’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뭔가… ‘웃픈’ 공감이 많이 되었달까요.

그 외에도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니」에서 그려지는 인회 언니의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물어보’고 ‘원하는 걸 꼭 찾아내서 기어코 이뤄내는’(75p) 모습은 저조차도 너무나 멋지고 존경스럽게 보였고요, 「빛의 한가운데」에서 미령이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고, 사는 동안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인연이 아니겠지’(131p)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또 저와 비슷하여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입체적인 소설 속 인물들. 그러나 누군가 손을 내밀면 분명히 그 손을 잡을 사람들. 그래서 좋았습니다. 무지성으로 위로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현실 속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감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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