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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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 취업을 준비하다보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적는 자소서 문항을 종종 만납니다. 그때 저는 일말의 고민 없이 ‘김병운’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습니다. 처음에 장편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읽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후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로 작가님의 문체와 저라는 사람의 주파수가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를 읽으면서는 확신했어요.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만났을 때 책장을 곧바로 넘기지 못하고 그곳에 오래 머물렀고요, 그런 문장들이 한둘도 아니고 수두룩했거든요. 어찌 이리도 섬세한 필치를 가졌을까, 하며 감탄하기도 했고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주파수가 잘 맞는다’는 표현을 썼는데요, 이는 작가님과 제가 비슷한 성격을 가져서, 혹은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내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교분」 속 주인공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었어요.(170p) 그래서 ‘항상 땅만 보고 걸’으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 했고요(164p). 어렸을 적의 제가 딱 그랬습니다. 그때 저는 미움받을 용기를 단 한 움큼도 지니고 있지 않았거든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튀지 않으려 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를 내뱉기보다는 삼키려 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소설을 읽으며 떠올랐어요. 그 시기를 지나온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잘 버텨내서 장하다고 해주고 싶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작가님께서도 어린 시절의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에게 위로를 건네는 듯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에서는 주인공이 친구의 조카를 만나면서 어렸을 적 여자 같다고 손가락질 받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데요.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의 내 모습이,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고 말하는 주인공이 여간 애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105p) 멋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숨겼을 테니까요. 어떤 마음으로 그 시기를 지나왔을지, 어떤 다짐을 하며 묵묵히 버텨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깊이의 절망이 아득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지금은 그 시기를 돌이켜 볼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진 걸까 싶어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김병운 작가님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고발을 던지면서도 사람을 믿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이번 소설집 역시 그런 작가님의 가치관을 담뿍 느낄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특히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속 진무 삼촌의 말은 압권이었습니다. 소설 속 진무 삼촌은 조카에게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다고 말합니다.(121p) ‘사람’에게 버림받고 부정당하더라도,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사람’이라 말하는 삼촌의 모습이 너무나 서글프고 뭉클했어요. 저 또한 사람 때문에 힘든 적 많았지만, 이를 극복해내는 건 여행 같은 취미가 아닌 ‘사람’이었으니깐요. 문득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것만큼 특별한 일이 또 있을까 싶네요.

작가님의 두번째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는 이전 작품보다 한발 더 나아간 성취를 보입니다. 퀴어한 소재가 대부분이었던 첫 소설집과는 달리, ‘잘못된 사랑’의 서사적 재미를 가진 「봄에는 더 잘해줘」, 그렇게도 미웠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등 예상을 한껏 빗나가는 훌륭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거든요. 아마 김병운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이번 작품집 역시 놀라운 마음으로 감명깊게 읽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11월에 만난 이 책, 하반기 버프(?)를 받아 아마 ‘올해의 책’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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