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에서 이리가 오늘의 젊은 작가 53
윤강은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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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가 찾아온 걸까요, 『저편에서 이리가』 속 지구는 기온이 심하게 낮아져 대멸종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그런 비현실적 배경을 대단히 친절하고 섬세하게 묘사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과 몰입이 수월하게끔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지 내 가장 높은 초소에 올라서면 망원경을 통해 먼 설원을, 새하얀 지평선을 건너다볼 수 있다. 그럴 때면 숨을 참아야 한다. 호흡할 때마다 짙은 입김이 번져 망원경 렌즈를 탁하게 물들이고 시야를 가로막기 때문에.’(32p) 같은 문장을 읽을 때는 감탄하기도 했더랬죠.

그런 한반도 위에는 서로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진 세 구역이 있습니다. 한반도 최남단의 생산 구역 ‘온실 마을’, 중부 지역 ‘한강 구역’ 그리고 대륙군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압록강 기지’. 이런 설정 또한 작가가 상당히 깊이 고심한 듯 탄탄하게 느껴졌습니다. 충분히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설득된다고 말이죠. 공간적인 배경과 그 안의 세계관이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으니, 앞으로 이 안에서 뻗어나갈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은 자연스레 부풀어 올랐습니다.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까, 과연 어떤 서사가 나를 빨아들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편에서 이리가』는 제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서사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듯했어요. 소설에는 다섯 명의 청년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그 심리를 윤강은 작가는 섬세한 필치로 조명합니다. ‘유안’과 ‘화린’ 간에는 어색하면서도 새롭게 친분을 쌓아가는 설렘의 과정이 도드라졌고요, ‘화린’과 ‘기주’ 사이에서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지만 서로에 대한 사소한 기대와 실망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여 결국 원망이 되면서 점차 멀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유안을 대하는 화린의 모습을, 기주가 약간의 시샘이 섞인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공감가다못해 감정이 이입되기도 했고요. 그런 기주의 곁에 새롭게 등장하는 ‘백건’이랄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은 생략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변수처럼 작용하는 ‘태하’ 등 각기 다른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단편이 아니라 장편소설에서만큼은, ‘서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거대 서사가 ‘장편’ 분량의 소설에서만큼은 꼭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테면 어떤 음모와 배신이랄지, 이를 간파한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극복한달지 등등… (글을 쓰다보니 『스노볼』(박소영)이 떠오르네요. 무척 재밌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편에서 이리가』에서는 그런 부분이 (적어도 저의 눈에는) 부족했습니다. 뭐, 대륙군이 침공한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정교하게 쌓아올린 배경과 세계관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세계관이나 인물들이 충분히 매력적인데, 그 매력을 서사가 살리지 못해 아쉬웠달까요. 물론 첫 소설이니까, 그만큼 앞으로 윤강은 작가가 쓸 작품이 기대되긴 합니다. 다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것에서 어느 정도 기대를 하긴 했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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