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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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취급이라면」 부분

삶을 사는 게, 살아내야 하는 게 가끔씩 갑갑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울’과는 다른 감정이다. 너무 열심히 달려와서 지쳐버린 ‘번아웃’과도 다르다. 음… 버겁다는 표현이 조금 더 알맞은 듯하다. 앞으로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인생의 단계랄지 장벽이랄지 그런 것들을 떠올려 볼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숨이 턱 막혀온다. 그런 내게 위의 시 구절은 생각지도 못하게 큰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처음에 저 구절을 읽었을 때 뭔가 감동이 느껴지긴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되게 혼란스러웠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는 그 연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어느 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 초 전

친구와 절연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이 있으므로

입과 귀에서 그 친구를 없애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 친구가 내게

나 또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서로 지나쳤으리라

멀리 온 정거장처럼 도를 넘어섰으리라

네가 억울하고 후련하듯

나도 후련하고 억울하리라

너는 나 없이도 친구가 많고

나는 친구 없이도 하늘이 맑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 지나치지 않도록 버스에서

창밖을 본다

창 속에 말 없이 앉아 있는 나를 본다

멋진 밤이다

「지나치다」 전문

친구와 절연해본 경험이 다들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딱 한 번 있다. 그 친구와 너무도 명징하게 ‘손절’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거대한 파급력을 끼쳤던 경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영향이 긍정적이지는 않았기에, 언제나 나는 그때의 경험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할 때마다 애써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 그리고 이 시를 만나니 그때의 나를 이제야 비로소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그 친구와 나는 서로 ‘도를 넘어섰’다. 그 애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억울하고 후련’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다시 도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 시적 화자처럼 나 또한 ‘창밖을’ 보고 그에 비친 ‘나’를 봐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과거의 나 자신을 반추하게 하는 시,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닐까?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 피가 될까봐

피가 씨가 될까봐

차라리 말을 할 수 없는 곳으로

한마디도 못 알아들을 루미니아로

(…)

말이 많아도

피가 튀지 않는 입들

한동안 루마니아를 사랑하기로 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루마니아에 말을 내려놓기로 했다

「늦가을 루마니아」 부분

(…) 내가 속았다 쾅! 내가 속였다 쾅! 실패했다 콰쾅! 너는 못났다 콰콰쾅! 끝장이다 콰콰쾅! 네가 싫다 쾅 콰콰쾅! 그 소리 막느라 한사코 청춘을 다 바쳤다 (…)

「피아노 소리」 부분

이 외에도 크나큰 울림이 느껴지는, 적잖은 감동을 주는 시들이 참 많았다. 현대시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이 시집이 요즘 역주행하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수한 이미지들만 나열해놓고 어디 한번 느낄 수 있으면 느껴보라지 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이 시집을 보고 좀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독자들을 배려하는 시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너무도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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