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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복복서가 / 2025년 5월
평점 :
#도서협찬
처음엔 제목부터 약간 거리감을 느꼈다. 『죽음의 부정』이라니. 무슨 철학서 같기도 하고, 왠지 어렵고 무거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실제로 철학서가 맞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열고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말은 무겁지만, 그걸 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은 꽤 익숙하고, 어쩌면 내 안에도 늘 있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저자 어니스트 베커는 이 책에서 인간이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하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애쓰는지를 파고든다. 그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영웅’이 되려 한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영웅은 꼭 전쟁에서 활약하는 위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의미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모든 욕망을 뜻한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 베커는 그 모든 게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죽음의 공포가 단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구조나 문화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잊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술을 창조하거나 권력을 쥐려 한다. 모두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착각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눌러보려는 시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의미 체계, 다른 ‘영웅 시스템’이 맞부딪치면서 전쟁이나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종교 간 갈등, 민족주의, 심지어 테러리즘 같은 극단적인 현상까지도 결국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만들어낸 상징 체계들 간의 충돌이라는 해석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이 책이 단순히 죽음이라는 주제를 비극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커는 오히려 죽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진짜 자유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지만, 그걸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죽음을 부정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삶을 다시 바라보라는 제안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이 절대 쉬운 건 아니다. 정신분석학, 철학, 인류학 이론들이 두껍게 깔려 있어서 계속 집중하지 않으면 내용을 금방 놓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문장들 사이사이에 놓인 번뜩이는 통찰들이 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예를 들어, “문명은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방어 기제”라는 말은 단순하지만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화나 제도들조차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되었다니, 생각해보면 꽤 날카로운 시선이다.
이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바뀐다거나 하지는 않다. 다만, 내가 왜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뭘 그렇게 증명하려고 애쓰는지를 잠깐이라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게 베커가 말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면,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부정하려는 마음은 나약함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가려는 의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인간다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서 묵직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