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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평점 :
『가능주의자』, 『시와 물질』 등의 시집으로 나에게 ‘믿고 읽는 시인’이라는 키워드가 붙은 나희덕 시인의 또다른 시집을 읽었다. 이전 두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뭔가 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세지는 덜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점이 나희덕 시인의 매력이라 생각해서 조금 아쉬운 감상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나희덕 시인 만의 시적 표현은 참 묵직하고도 아름다웠다. 어떤 시인이 그랬다. 시집 한 권 중에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면 성공한 독서라고. 그렇다면 내게 나희덕 시인은 성공만을 안겨주는 시인일 터이다.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그들은 더 이상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이 끝났으므로
분장 인물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들
다리 저는 여자, 순정한 매춘부,
사랑에 빠진 남자, 잔인한 살인청부업자,
교활한 상점 주인에서 천진한 소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될 수 있고
비로소 아무도 아니게 될 수 있는 곳
무대에서는 널빤지와 걸레도 소품이 된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는
다시 널빤지와 걸레로 돌아가야 한다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이 벌어지는 뒷골목에서
운명이 흘리고 간 빵가루를 주워 먹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
포충망 속의 나비처럼 파닥거리는 그들
모든 게 연극에 불과하다면
삶은 지퍼백처럼 얼마나 간편할 것인가
하지만 막이 언제 열리고 닫힐지
다음에 누가 등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투명한 비닐 속에서
여전히 진지하게 대사를 읊조리는 등장인물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
연극 같은 삶이 끝났으므로
그러나 그녀의 발은 알고 있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손은 알고 있다
삶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는 것을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서 있으면
어떤 움직임이 문득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