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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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현대시를 그리 잘 읽지 않는다. 도통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렇다. 오로지 이미지와 추상(抽象)들을 맥락없이 겹겹이 쌓아서 독자에게 던져놓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시들을 읽노라면 마음에 와닿기는 커녕 ‘어디 한번 해석해보라지?’하고 비웃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한다. 시를 읽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시와 물질>들 속 시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문학적 표현이라는 그릇에 담겨 전해질 때 더욱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문학적 감수성이 공감과 이입을 불러일으켜 더욱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시의 효용을 잠시 의심했었으나,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책망한다. 아름다운 시는 아름답기 때문에 강력하다는 것을, <시와 물질>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서울역 2층 파리크라상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기차에서 맛있게 먹으면서도 몰랐다

그날 새벽, 한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 교반기 속으로

상반신이 빨려들어가 숨졌다는 것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이십대 노동자의 사망 원인은 질식사,

사망 현장에서 생산한 샌드위치 사만여 개가 모두 유통되었다는 것을

내가 먹은 샌드위치도 그중 하나였을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피 묻은 샌드위치를 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로 다음날 공장축은

사고 난 교반기를 흰 천으로 덮어두고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

이젠 샌드위치를 먹지 못할 것 같다

빵을 굽고 야채를 씻고 햄을 썰고 소스를 만드는 손들이 떠올라

교반기 앞에 종일 서 있을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

교반기 속으로 빨려들어간 몸이 떠올라

그러나 지금도 공장은 돌아가고 교반기는 돌아가고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가고 새벽에도 작업조는 돌아가고

사람을 삼킨 교반기 속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린 노동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샌드위치> 부분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이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석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들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광장의 재발견> 부분

어떤 증오와 조롱의 말을 들었다

독기 서린 말의 과녁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잠시의 기쁨을 꺼버리기에는 충분했지

축하의 말조차 감정의 이물질이 섞여 있다는 것을

그들의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쩌다 햇볕이 좀더 드는 자리에 앉게 되면

치러야 할 몫이 있는 법

자신은 왜 그늘에만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빛에 대한 변명을 해서는 안 되지

모래 위에 뱉은 침처럼 부글거리는 말,

침이 얼굴에 쏟아지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침에서 나온 날카로운 침,

급소를 찔리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까

입에서 버석거리는 말

목에 가시처럼 박히는 말

심장을 뚫고 흘러들어오는 말

혈관을 조여드는 말

내장을 찌르고 훑어내는 말

배설되지 않고 계속 꾸룩거리는 말

밀어내려 할수록 달라붙는 말

오후 내내 걸었더니 체기가 조금 내려간 것 같다

부디, 오늘의 햇볕에 대해

입을 다물자

입속에서 침과 모래가 섞여 울컥거린다 해도

<오늘의 햇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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