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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정해연 지음 / &(앤드) / 2025년 3월
평점 :
#도서협찬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총 두 개의 중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피해자 유족의 시점, 다른 하나는 가해자 노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두 편의 소설은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사의 흐름을 개별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똑같다.
‘모든 것은 엉망이었다.’
피해자 유족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챕터는 딸을 잃은 어머니의 감정이 ‘우울, 체념’이라는 하강의 늪이 아닌, ‘분노’라는 상승 곡선을 타고 가파르게 치솟는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파국’이라 부를 법한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 독자로서 너무도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발 멈추라고, 거기까지만 하라고, 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외쳤다. 그러나 실제였다면, 현실에 그런 사람이 내 옆에 만약 있다면 아마 절대 그럴 수 없겠지. 그 누가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감히’ 헤아릴 수 있으랴.
이와 달리 가해자 시점을 읽을 때에 나의 마음을 완전히 덮쳤던 감정은 ‘분노’였다. 가해자 본인의 감정보다 그를 둘러싼 가족의 행동들, 그리고 법과 제도들이 상당히 큰 분노를 유발한다. 어떻게든 낮은 형량을 받으려 발버둥치는 노인의 딸, 그런 그녀에게 ‘공탁금’ 제도를 제안하는 변호사 등… 여기서 공탁금이란 ‘합의를 제안하는 차원에서 걸어두는 돈’으로, 만약 피해자 측에서 합의를 거절하면 이는 국가로 귀속되지만 ‘합의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으로 참작되어 낮은 형량을 받게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제도이다. 현실적인 제도의 부조리함까지 고발하는 날카로운 작품이어서 더더욱 이 책을 읽기가 힘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우리는 피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불편해서, 불쾌해서 이런 작품들을 피하면 우리는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가. 감정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기 위해서, 연대할 수 있어서 읽는 것 아닌가? <드라이브>를 읽기 전까지 나는 ‘공탁금’ 제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교통사고 사건에 부여되는 평균적인 형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임에도 나는 이들의 감정에 대해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직접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그 문턱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이 상당히 불편하고 힘들었다는 점에서 쉽게 추천하지는 못하겠으나, 잘 읽히면서 동시에 묵직한 사회적 메세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