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시인선 202
고선경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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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현대시는 더더욱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도 예전의 서정시는 읽다보면 가슴이 한없이 사무칠만큼 시구가 와닿을 때가 많은데, 현대시 같은 경우에는 그런 거 없이 오직 ‘이미지의 나열’만 무수히 늘어놓은 듯하달까. 조금 세게 말하자면 요즘 젊은 시인들이 독자에게 무책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내가 어째서 <샤워젤과 소다수>를 읽게 되었는가 하면, 이건 다 ‘알라딘’ 때문이었다.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도 그렇듯 알라딘에는 판매량과 직결되는 ‘세일즈포인트’라는 것이 있다. 보통 천 단위면 평타는 쳤다고 볼 수 있고, 그도 안되는 백 단위라면 아주 안팔린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시집은 자그마치 만 단위인 것이다…! 시집이 만 단위의 세일즈포인트를 찍은 걸 처음 보는 터라 도저히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읽은 이 시집은 현대시에 대한 나의 편견을 얼마 정도 깨부수었다. 한줄평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집은 MZ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정말이지 ‘힙’하기 그지없는 세련된 시집이라는 감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동안의 시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감탄을 느꼈는데, 그런 느낌조차 너무도 신선해서 오히려 좋았다.

친구는 지우개를 빌려줬지 향기나는 볼펜을 빨아봐서

잉크맛 좀 아는 친구였어 도시락 모양 지우개는 기능을 못하더군

부서져 가루가 되었어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 그 지우개의 용도는 귀여움이었는데

<잼이 되지 못한 과거> 부분

다시 보고 싶었던 드라마들은 이제 여러 OTT 플랫폼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어서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가장 귀여웠을 때 나는 땅콩이 없는 자유시간을 먹고 싶었다> 부분

새로운 혼잣말을 하고 싶다

고민은 여러 번 빨래한 청바지처럼 물이 다 빠졌다

<토마토 젤리> 부분

웃는 얼굴에 침 뱉기는 어렵지만

웃는 얼굴로 침 뱉기는 참 쉽다

<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부분

오늘은 재료 소진으로 일찍 마감합니다

팻말을 본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

나는 그 가게의 주인이 되고 싶지

매일이 소진의 나날인데

나를 찾아오는 발길은 드물지

<돈이 많았으면 좋겠지> 부분

엄마는 늘 무언가의 효능을 궁금해한다

블루베리 효능

토마토 효능

치자 효능

나는 다정의 효능이나

시의 효능에 대해 골몰한다

감동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관심……

받겠냐?

내 시에 비타민이나

식이섬유가 함유돼 있지는 않아

<건강에 좋은 시> 부분

어떤가. 혹 시 구절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거나 ‘오…’하며 감탄하지는 않았는가? 아니라면 안타깝게 되었지만, 혹 그렇다면 이 시인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 다섯 장정도 되는 분량의 ‘스트릿 문학 파이터’라는 시를 읽으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였는데, 그 시는 워낙 분량이 길고 내용을 요약하기도 힘들어 직접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재밌는’ 시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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