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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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이름이 아닌 ‘그’와 ‘그녀’ 만으로 지칭되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정치인과 결혼한 후 공허감에 휩싸인 영화배우 ‘그녀’와, 애인을 잃은 후 파리의 비좁은 공간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함께 출연했던 영화가 프랑스 낭트 영화제에서 4K로 재개봉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 영화제에서 재회하게 된다. 그렇게 이들의 서사가, 사무친다는 표현이 절감될 정도로 너무도 슬픈 사연이, 두 사람의 재회를 계기로 차츰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는 모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그의 경우는 아버지가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무리한 사업을 벌였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그를 남겨둔 채 떠나버렸고, 그 장면을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또한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책임으로만 돌린다. 너가 게이여서, 너가 변태여서 등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그에게 모진 말을 내뱉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 또한 기구한 삶을 살아왔다. 그녀는 매트리스 광고에서 남자 아이와 함께 자는 장면을 찍었다는 이유로 학교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거칠고 날카로운 언어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광고의 효과로 인해 그녀의 어머니는 오로지 성공만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내면을 살펴볼 겨를 따윈 없었다. 이는 곧 그녀의 불면증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자라면서 수많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성폭력에 시달리고, 결국 정치인과 결혼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하는가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한마디가 모든 것을 압축하여 설명한다. 사실 자신은 연쇄살인마라는 것이다.

(스포일러 주의)

결말에 들어서 그녀가 자신을 연쇄살인마라고 말한 이유가 밝혀진다. 그녀는 남편의 시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낳기를 강요받지만, 첫째부터 셋째까지 모두 딸만을 낳았다. 심지어 셋째 딸이 죽게 되었을 때도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응은 불가해할 정도로 냉담하였다. 이후에도 그녀는 아들을 낳으라는 강압에 수차례 임신하게 되고, 만약 딸이 들어서면 중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수많은 딸들을 죽인 결과 아들을 낳는 데 성공하지만, 이 또한 행복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아들은 그녀를 떠나버렸고, 또 어릴 적 그녀에게서 들은 그를 찾아가 자신을 범해달라고 부탁하며, 그는 아들의 요구를 받아준다. 즉, 아들은 그렇게 자신의 성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와 그녀가 재회한 현재 시점에서, 그녀는 그에게 아들을 범했냐고 묻는다. 그리고 답을 망설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한마디를 덧붙인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짜릿할 기회가 없었거든. 나는 한 번도 짜릿했던 적이 없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러니까, 지금 나의 가장 큰 바람은, 내 아이가 짜릿해지는 거야.” (469p)

(스포일러 끝)

두 주인공의 현재 모습과 과거 서사가 장면 단위로 교차하며 전개되는 탓에,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초반에 혼란스러움을 불가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풍부한 이미지들의 향연 덕분에 그 서사를 차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단편적인 서사 조각들이 하나둘 모여 쌓아올려지고, 이는 결국 결말에 가서 폭발하며 독자들에게 거대한 슬픔의 전율을 선사한다. 거시적으로 대만의 역사를 살펴보았던 전작 <귀신들의 땅>과는 달리 <67번째 천산갑>은 보다 개인적인 서사에 집중하여 현대 시점의 성소수자들과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어 보다 더 섬세하게 와닿았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성차별, 성폭행으로만 보지 말고 그저 한 사람의 아픈 내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는 관점으로 읽기를 바란다. 불우한 과거로 인한 상처의 치유를 향한 두 주인공의 발돋움이 보다 더 벅차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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