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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평점 :
‘번역’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해외문학과는 다르게, 작가가 쓴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국문학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가독성일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이 철학적이라거나 깊이가 있을 수록 어렵게 느껴지긴 할테지만, 번역되지 않은 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글맛’은 분명 한국문학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을 놓쳤다. 물론 그 유명한 삼국지의 ‘초선’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작품인 만큼,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 시대의 고어(古語)들이 쓰이는 게 작품 전체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과했다. 굳이 고어를 쓰지 않고도 쉽게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인데 왜 이렇게 썼을까 싶은 부분들이 많이 보였다. 하여 한번에 쭉 읽어내려가지 못하고 중간에 계속 덜컥 걸리는 듯한 느낌이 많았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가? 중국의 4대 미녀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 유일하게 정사(正史)가 아닌 삼국지연의에만 등장하는 가공 인물 ‘초선’이 주인공인 만큼 작가의 창작 영역이 활발할 수 있는 소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왜 초선이라는 인물에 퀴어 서사를 집어넣었을까. 굳이, 구태여, 대체 왜.
삼국지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초선은 삼국지에서 여포와 동탁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알고 있다. 단순히 계략의 도구로서 이용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교묘한 말솜씨를 발휘해 동탁과 여포를 속여 이간질하는 지혜로움을 지닌 캐릭터로 알고 있는 만큼, 여포와 동탁 간에 있었던 일화들이 ㅂ이 작품에서 초선의 시점으로 밀도 높게 다뤄지기를 기대하며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인데… 이 소설은 그보다 ‘초선의 과거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가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중에 퀴어 서사가 포함된 것이다. 음… 나는 이 서사의 개연성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 정말 작가가 ‘억지로’ 넣은 듯한 설정으로 느껴져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초선이라는 인물의 지혜랄지, 계략이랄지 그런 능동적으로 본인의 전략을 세우는 인물로 그렸으면 그나마 괜찮았으련만, 이 소설에서는 그저 후견인 왕윤이 시키는 대로 휘둘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에 그쳤다. 삼국지에서 찾기 힘든 매력적인 이 여성 캐릭터를 대체 왜 이렇게 망쳐놓은 걸까. 퀴어 서사를 넣는 것보다 오히려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는 것이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훨씬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여 다른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난 너무 아쉽고 실망스럽기만 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