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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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2기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시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를 시의 세계로 입문시켰던 나의 인생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쓴 정호승 시인님의 수필집이다. 원래 에세이 및 수필을 잘 읽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역시 정호승은 정호승이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시 한 편과 그에 대한 배경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시인님만의 생각과 소소한 일상들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들로 쓰여 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한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으냐

혹시 배는 고프지 않으냐

엄마는 신발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는데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긴 먹었느냐

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

팽목항의 갈매기들이 날지 못하고

팽목항의 등대마저 밤마다 꺼져가도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시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전문

시의 일부만을 옮겨 적고 싶었지만, 도저히 어느 하나 자르지 못하겠어서 결국 전문을 올린다. 처음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시를 읽었을 땐 그저 ‘이별’의 마음을 담은 시겠거니 하며 특별한 감정을 따로 느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글을 읽고선 무거운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 시는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추모시였던 것이다. 이를 알고 다시 시 구절을 곱씹어보면 다르게 읽히는 지점들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한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으냐’ 등의 구절은 이 시가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결국은 이 사건을 잊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적은 것으로 다시 읽혔다.

좋은 시구들, 그리고 또 좋은 문장들이 이 책에는 많았지만 어쩐지 가장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 시와 수필은 이것이었다. 단순히 ‘슬프다’고 말하기엔 표현이 너무 가벼운 듯하여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시인의 표현을 빌려 나의 감정을 대신 적는다. 시간이 오래 흘렀지만, 잊지 말자. ‘이기와 탐욕에 배불러 안일과 이익만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을. ‘오늘의 대한민국에 사는 나를 대신해서 희생된’ 이들을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단원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은 멈춰야 하는데 여전히 달은 뜨고 꽃은 핀다. 지는 꽃은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나지만 아이들은 봄이 와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환히 웃는 얼굴로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애간장을 태워서 죄송하다고 엄마 품에 덥석 안기면 얼마나 좋을까.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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