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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짧은 페이지 안에서도 총 세 편의 단편이 소설되어있는 이 소설집은 내가 처음으로 읽어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이다. 아무래도 <향수>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겠지만 우리 어머니께서 먼저 읽으신 뒤 ‘너무 찝찝해서 읽다가 집어던질 뻔하였다’는 평을 내게 남기신 뒤로 그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아 아직까지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어찌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함은… 바로 중고서점에서의 충동구매였던 것이다…
책 자체가 아주 얇은 두께를 지녔기에 당연히 짧은 경장편 (혹은 중편) 분량의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 안에서도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보니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무 기대없이 펼처들었는데, 전체 분량이 여섯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첫번째 수록작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굉장한 충격에 빠졌더랬다. ‘진정한 소설의 정수를 느끼려면 단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몇몇 전문가들을 보긴 했지만 그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말의 참뜻을 뉘우칠 수 있었다. 뒤이어 수록된 <승부>와 <장인 뮈사르의 유언>도 좋았으나,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표제작 <깊이에의 강요>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자 한다.
여섯 페이지의 내용을 굳이 적어야 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리뷰를 쓰려면 어찌되었든 내용에 대한 짤막한 요약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 간단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어느 젊은 화가가 평론가에게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을 들은 뒤 서서히, 하지만 단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내용이다. 소묘에 재능을 보이던 유망한 화가였건만, 그녀(화가)를 응원하기 위해 던진 평론가의 한마디가 완전히 그녀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저 ‘말의 힘’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천명하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일까, 결말까지 읽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스포일러 주의) 화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데, 그를 추모하기 위해 적은 평론가의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더랬다.
🗣 (…)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14p)
깊이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화가를 죽인 평론가는 화가의 죽음 이후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그 화가의 작품에는 삶을 깊이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장면을 읽은 후 적지않은, 아니 너무도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사람의 ‘말’이란 것이 이렇게나 가벼웠던 것인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던 나로서는 평론가의 말에 휘둘리는 화가로부터 내 모습이 겹쳐 보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화가와 섣부른 언행을 내뱉는 평론가의 모습을 통해 새로이 세상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그렇게 휘둘릴 필요 없다고, 물론 타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있겠지만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