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에는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처를 지닌 두 어린 영혼이 등장한다. 그 중 '유찬'이라는 소년은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독심술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이 능력은 찬이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찬이를 괴롭게 한다. 듣고 싶은 사람의 마음만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사람들의 속마음이 정제되지 않고 온전하게 찬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찬이는 주변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이어폰을 꽂아야만 비로소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찬이는 자신에게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능력이 생긴 시점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집안에 화재가 발생하여 찬이의 부모가 자신을 껴안고 죽은 그날을 기점으로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자신을 향해 꼭 살아야 된다고 처절하면서도 굳은 결의로 외치는 부모의 그 속마음을, 찬이는 두 귀로 똑똑하게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사건을 빠르게 덮는 데에 급급했다. 파출소에서는 정확한 범인을 찾거나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은 채 '가스 유출로 인한 화재'로 마무리했고, 다른 마을 사람들 또한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을 꺼리거나 쉬쉬할 뿐이었다. 그렇게 찬이의 마음속은 엄청난 생채기가 나며 빗장을 걸어잠그게 되었고, 그 뒤로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이 능력을 끊어내지 못한 채 죽지 못해 사는 느낌으로 삶을 살아왔다. 


그런 찬이에게 '하지오'라는 동갑내기 소녀가 나타난다. 지오는 서울에서 전학 온 유도부 학생이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 지오는 항상 스스로 태어나선 안 되었다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사는 아이였다. 지오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는다. 엄마와 떨어져 시골 동네로 내려가 아빠와 같이 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아빠'라는 존재가 자신에겐 완전히 없는 줄만 알았던 지오였기에, 비록 아픈 엄마를 위해 시골 동네로 내려오긴 했지만 지오는 아빠라는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인정할 수조차 없었다. 


소설은 지오가 찬이네 반으로 전학을 오게 되며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타인의 속마음이 들리는 게 괴로웠던 찬이에게, 지오가 곁에 있기만 하면 그 무수한 소음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찬이는 지오라는 아이에게 호기심을 품게 되고, 둘이 붙어있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내밀한 상처들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아픈 속마음을 서로에게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마음 속의 상처는 오로지 본인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상처를 준 당사자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편협한 시선으로만 바라보다보니 그 아픔은 더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두 주인공 찬이와 지오는 각자의 단단한 그 아픔을 풀어줄 수 있는 시선을 서로에게 제공한다. 지오는 찬이에게 화재가 발생했던 그 날 마을 사람들의 노력을 들려주었고, 찬이는 지오에게 자신의 복잡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준다. 감정적인 상태에서 한발짝 멀어질 수 있도록, 더 넓은 시야로써 아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더 해. 들어 줄게." / "......뭐?" / "궁금했었어. 그래서 듣고 싶었어, 네 속마음." / 그 말 한마디에 지오는 주저앉아 버린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듯 목 놓아 운다. (중략) 나는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저 함께 앉아 있어 준다. 언젠가 내가 그랬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래 주길 바랐던 것처럼. (58쪽)


이 작품을 두고 '연애소설'이라 칭하는 출판사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게 이 소설은 그저 내밀한 아픔을 지닌 아직 미숙한 소년소녀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과정을 그린, 너무도 아름다운 '성장소설'이었다. 찬이가 지오에게 그리고 지오가 찬이에게 해준 것처럼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만약 친구가 내게 본인의 고민과 고충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해야 그 친구의 아픔을 조금은 덜게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괜찮다거나 다 잘될 거라는 속이 텅 빈 말을 내뱉는 대신 그저 묵묵히 친구의 그 아픔을 들어주는 것이다, 찬이가 지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친구에게 가장 필요하고 힘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고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지오가 찬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