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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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혈액암(백혈병) 진단을 받게 되면 어떨까. 일순간 멍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채 병원의 안내에 따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이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겨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항암 치료가 시작되어 있어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혹은 전생에 무슨 죄를 범했기에 신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린 걸까, 온갖 한탄을 쏟아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절대 맞닥뜨리고 싶지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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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황승택 기자가 실제로 그 상황을 맞게 된 전후 사정과 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담히 적은 에세이다. 그저 열심히 이 사회를 살아갈 뿐이었는데 느닷없이 마주한 혈액암(백혈병)이라는 시련에 대해, 처음에는 원망과 한탄의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병을 통해 저자는 다시금 본인의 삶을 돌아보며 그동안 본인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앞으로는 어떤 것을 중요한 가치로 둘 것인지를 돌이켜보는 과정을 가진다. 그 속에서는 새롭게 알게 된 환자의 처지와 심리도 있고, 조금은 씁쓸한 유머도 있으며, 독자들에게 건네는 따듯한 충고의 한마디도 담겨 있다.

🗣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은 격리일 것입니다. 암 환자들은 긴 항암 치료를 반복하면서 왜 내가 병에 걸려야 하는가 하는 우울증과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고립감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주치의도 “괜히 정신력으로 버티지 말고 힘들면 차라리 약을 달라고 하는 게 좋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22p)

🗣 백혈병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저는 이제 이해합니다. 전에는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위해 백혈병이 진부하게 이용되는 걸로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직접 질병을 겪어보니 정말 건강한 사람을 한순간에 쓰러뜨리는 게 백혈병이더군요. 그래서 백혈병 환자가 나오는 드라마 작가들에게 함부로 막장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습니다. (37p)

🗣 전 다시 왜 신이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찾았거나 혹은 신께서 주신 답은 만약 2017년 1월에 복귀했다면 그동안의 공백을 만회하겠다는 마음이 앞서 결국 몸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크니 이를 막으려고 호된 교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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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평소에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말 잘 쓰인 에세이 한 편을 읽을 때는 소설 여러 편을 읽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울림을 느끼는 것 같다. 이 책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단순히 백혈병에 걸린 그 과정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백혈병 투병 과정을 보는 동안에는 마치 내 가족이 백혈병 환자인 양 마음이 너무 아팠고, 책을 덮은 뒤에는 내가 지금 살면서 무심코 놓치고 있는 게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정말 와닿는 좋은 에세이 한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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