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민음의 시 256
손미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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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 손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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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포시집…? 아니면 스릴러시집…? 시집을 읽으면서 ‘무섭다’는 감정을 느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시집으로부터 처음 느껴보는 이런 감상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새롭고 참신해서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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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어요. 빼 주세요.

너의 몸통을 피워 무는데

피부 속에서 무언가 속삭인다.


… 살아 있어 …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며

깊게 찌르는 너는

피도 없어 보인다


문밖에서 자동차가 뒤집힌다.

네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 <사혈(瀉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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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찔러서 피를 뺀다는 뜻의 ‘사혈(瀉血)’을 제목으로 하는 이 시에서, ‘죽었어요. 빼 주세요.’라며 ‘피도 없어 보’이는 ‘너’를 화자는 ‘깊게 찌르’지만 어디선가 ‘… 살아 있어 …’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 시의 화자는 실제로 사혈을 하는 것일까, 더 무서운 것은 ‘문밖에서 자동차가 뒤집’히는 것을 보며 그 자동차 안에 ‘네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하는 거다. 화자가 상대를 직접 죽이고 있는 과정 중에 든 생각인지, 아니면 상대를 죽이는 상상 도중에 문밖의 자동차를 보고서 머릿속 장면이 전환된 건지, 어찌되었든 읽으면서 정말 찝찝하고 무서운 여운이 계속 마음 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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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열린다 네가 닫힌다

따라 나가던 내가 닫힌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문을 열고 들어가

무수히 많은 의자에 앉았었지만


벌컥 열고 들어와

누군가 너를 훔쳐갈까 두려웠다


비밀이었던 문이 삭제된다

힘주어 문고리를 물고 있던 복도도 사라진다


더는 애쓰지 말자


손잡이 떨어진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참 오래도 서 있었다


어쩌면 문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거다

나는 이제 네가 궁금하지 않다


 - <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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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가 <사혈(瀉血)>같지는 않다. 위의 <문>이라는 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별 과정을 덤덤하게 그려낸 듯한, 그래서 가장 와닿았던 시다. ‘나’에게서 ‘네’가 떠나는 것을 ‘문이 열린다 네가 닫힌다’고 표현한 것도, 그렇게 떠나는 상대를 잡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잡지 못하는 화자의 마음을 ‘따라 나가던 내가 닫힌다’고 표현한 것도 너무 좋았다. 더이상 닿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을 둘 사이에 ‘손잡이 떨어진 문’을 둔 것으로 표현한 것이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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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는 문이 있었고, 그 문에는 손잡이가 없으므로 화자는 그 문을 열고 상대를 따라갈 수 없었고, 그럼에도 화자는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었기에 오랜 시간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하듯이 이 시의 화자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나는 이제 네가 궁금하지 않다’고 결국 선언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읽으면서 화자가 상대를 아직 잊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문장은 ‘아직 잊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잊어보려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욱 슬프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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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친한 학과 동기 형이 추천해주었다. 읽는 동안에는 놀란 가슴 진정시키느라 무던히 애썼지만, 다 읽고 나니 그 여운이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시집을 주저 않고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이 시집을 추천받을 때 ‘첫번째 시의 임팩트가 강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랬다. 그 시의 일부를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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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얘기 안 했어

장례도 없이

환생도 없이

같은 몸에서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다는 걸


 - <옥수수 귀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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