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시선 48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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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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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에 떨어지는 폭포는 아니다

절벽 끝에 부서지는 파도도 아니다

해 뜨기 전부터 풀잎에 맺혀

나를 기다리는 아침 이슬도 아니다

가을비 오는 날

낡은 아파트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늦가을의 눈물이다

바쁘나 내가 니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

그런데 니가 너무 바빠서

말끝을 흐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늙은 눈물이다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러 바쁘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흙이 된 아버지 앞에 떨구는

내 참회의 때늦은 눈물이다


- <낙수(落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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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정호승 시인님의 등단 50주년을 맞는 올해에 출간된 시집이다. 확실히 ‘50년’이라는 시력(詩歷)에서 묻어나오는 연륜이 여실히 느껴지는 시들을 풍부히 감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낙수>에서는 정호승 시인께서 경험한 부모님의 죽음과 그로 인해 연상되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사무치도록 너무도 아프게 느껴졌다. 장르를 막론하고 ‘부모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 그중에서도 특히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은 내가 쉬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마음이 심하게 요동칠 것을 알아서 책을 펴기가 무섭다. 그럼에도 막상 그런 작품을 읽고 나서는,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묵직하게 박히는 여운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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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다시 회초리를 들어 사는 게 왜 그 모양이냐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피가 나도록 제 종아리를 때려주세요

간절히 소리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종아리를 걷은 채 서서 울먹이다가

어머니가 빨래하던 수돗가에 회초리를 갖다놓았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회초리에 매화꽃이 피었다

- <회초리꽃>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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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호승 시인님은 부모님을 회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서는 (남아있는 약간의 미련을 버리고서) 죽음을 담담하게 준비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나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나도 나이를 먹고 늙게 된다면, 정호승 시인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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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이 되어 당신이 찾아오셨다

창밖에 바람은 부는데

내다 엄마다 문 열어라

인터폰을 누르고

찬바람과 함께 성큼 들어오셨다

당신은 나를 한번 안아주지도 않고

머리에 이고 온 천국의 진흙 한동이

내 아파트 일층 베란다에 붓고

꽃밭을 만드신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데

머위도 심고 메꽃도 채송화도 심고

어둠이 깃든 창밖을 한참 내다보시다가

다시 진흙이 되어 돌아가신다

가자 이제 엄마하고 같이 가자

나는 신용카드가 든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아들도 며느리도 출근한 사이에

지갑도 집도 버리고

성큼 당신 뒤를 따른다

이번에는 당신 손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고

당신 손을 꼭 잡고


- <진흙>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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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몇 년 더 살아본 선배로서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더라, 하고 교훈을 주는 듯한 시도 있었고, 험난한 세상살이 때문에 사는 게 힘들지는 않냐고 어깨를 토닥이는 듯한 시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 한켠이 따스하게 편안해졌다. 분명한 건 이 시집이 내 마음을 많이 건드리고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시를 아직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정호승 시인님을 내 인생 시인으로 마음 속에 담아둘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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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게 해주세요

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주소서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새해의 기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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