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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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 김병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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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읽은 후로 김병운 작가님(의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보통 퀴어 문학을 읽노라면,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고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크게 공감을 두지 않은 채 그저 제삼자의 시각으로만 멀리서 바라보듯 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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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병운 작가님의 작품은 달랐다. 퀴어에 대해 올바른 사고방식을 강제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차별을 유발하는, 지금의 이 현실에 대한 무력함을 그저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을 김병운 작가님은 담담하고도 날카로운 문체로 드러낸다. 전작에 이어서 이번 단편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많이 기대했고, 그 이상이었다.

🗣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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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고, 그 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윤광호>는 ‘소설보다 봄 2022’에서 먼저 읽었었다. 두 작품 모두 좋았기에 작가님의 단편집이 더더욱 기다려져 애가 타기도 했다. 어쨌든 이 작품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이다. 이 작품이 아마 작가님의 자전적인 서사를 가장 많이 담아낸 작품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주인공 마음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쓰여 있어서 그 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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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내가 학창 시절의 절친이었던 K와의 만남을 기피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K가 유부남에 애 아빠인 이성애자라는 것, 다른 하나는 K가 내 에세이집을 읽었다는 것. (중략) 이성애자 여성이라고 해서 다 포용적일리 없고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해서 다 배타적일리 없건만, 나는 언젠가부터 그래도 남성보다는 여성 쪽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고, K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분명히 내게 어떤 벽으로 다가왔다.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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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에서는 주인공이 학창시절 절친이었던 친구에게 자신의 에세이를 읽었다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지만 그를 꺼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냥 친한 것도 아니고 ‘절친’했던 친구이기에, 오랜만에 만났을 때 면전에서 자신이 부정당하거나 비난받을 때의 심리적 충격이 거대할 것임을 알았으므로, 절친했음에도 만나기가 꺼려지는 그 마음이 너무도 잘 와닿았다. 아주 친했기 때문에, 애틋하고 소중한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그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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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그 친구를 만나보니, 그는 에세이집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애인을 당연하게도 ‘남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주인공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친구를 만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그 거대하고 무거운 걱정스런 마음이 거짓말처럼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벅차오르는 안도와 친구에 대한 고마움 등의 여러 마음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 김병운 작가는 그 마음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덤덤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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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K의 헛발질에 긴장이 풀리면서 피식 안도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아니, 서너 박자쯤 늦게 깨달았다. K가 내 에세이집에 등장한 애인을 당연히 남자라 생각했다는 것을. (중략) 굳이 되묻지 않아도 K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네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달라질 게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동안 나를 만나려 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중략)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삼키면서 말했다. / 넌 진짜…….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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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내가 쓰는 글이 너무 긴 것 같아서 되도록 짧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너무 좋았던 작품들에 대한 감상은 불가피하게 길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 이 책, 너무 좋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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