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봄 2022 소설 보다
김병운.위수정.이주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보다 봄 2022> - 김병운, 위수정, 이주혜 ⭐️

.

‘소설 보다’ 시리즈는 세 개의 단편 소설이 묶여 3개월에 한번씩 출간되는 단편집으로 김병운 작가님의 <윤광호>, 위수정 작가님의 <아무도>, 이주혜 작가님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의 세 단편 소설이 실려있었다. 전체적인 총평을 먼저 하자면, 김병운 작가님의 글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위수정 작가님에 입덕해서 나왔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다른 두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세 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아무도>였다. 그럼 빠르게 세 작품을 톺아보도록 하겠다.

.

<윤광호>는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을 위해 힘쓰는 ‘윤광호’라는 인물의 삶을 돌아보며 추모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전작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도 퀴어 문학이어서 이번 작품은 동성애가 아닌 다른 소재를 다룬 김병운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쉽게도 <윤광호> 역시 퀴어 문학이었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미국의 어느 게이 클럽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을 들으며 충격을 받아 퀴어를 소재로 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실제 김병운 작가님이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쓰게 된 배경으로 알고 있어서, 작가님의 경험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도>는 남편 ‘수형’을 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아내 ‘희진’의 심리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나는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룬 많은 창작물들을 봐왔다.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이런 소재는 아무래도 자극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아무도>는 달랐다. 불륜 당사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다 보니,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불륜이 아니라 가슴 아픈 로맨스를 겪는 한 사람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정말 신선하고 재밌다고 느낀 작품이었다. 위수정 작가님의 다른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수술실에서 유체 이탈을 겪은 ‘은정’이 과거를 회상하며 그녀가 겪은 일들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면서 스무살에 ‘소녀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회사에서도 안좋은 소문을 감당해야했던 삶이었다. 세 작품 중에서는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고 별로였다고 생각을 했지만, 다 읽은 뒤에 찾아오는 여운 또한 가장 묵직했다. 일단 회사 사장과 관련된 반전 때문에 놀란 마음을 추스리기 힘들었고, ‘은정’이 이토록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며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이 작품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앞으로 ‘소설 보다’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세 작품 모두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작고 얇고 가벼운 겉모습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 정말 좋았다. 제대로 된 ‘한국 순문학’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입문작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작품 별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문단)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짓겠다.

.

🗣 우리가 어떤 정체성이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윤광호>

.

🗣 수형 씨,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런 게 사람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런 사랑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원해. 지금껏 이렇게 누군가를 원한 적이 없었어. 아니, 있었겠지.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원해. 나를 개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래,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이건 그저 개 같은 욕망일 뿐이라고. 미래는 없다고. 지나가는 바람이라서 나중에 백퍼 후회할거라고. 더러운 꼴을 볼 거라고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아무도>

.

🗣 그때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제 아버지는 언제쯤 돈을 벌기 시작할까요? 내가 말해놓고 내가 놀랐다.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엄마처럼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무당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빤히 보며 혀를 찼다. 언니도 참 딱하네. 나만큼 딱해. 고작 스무 살짜리가 참 무겁네. 이고 졌네, 이고 졌어. 나는 그 말을 아버지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최종 선언으로 이해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