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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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군더더기 없는 촌철살인 시사 코멘트는, 우리의 가슴을 후련하게도 하지만 글도 그에 못지않게 잘 쓴다. 과거에 그의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읽고, 한동안 그를 잊고 지냈는데 호모 학명을 제목으로 한 이 책이 내게 다가왔다.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195쪽)라는 말이 인터넷에 떠돈다더니 명불허전이라고 딱 맞는 말이다.

 문화 일류학적이고 글쓰기라고 할까, 각각의 소제목 아래 우리‘호모 코레아니쿠스’의 특징을 잘 그려냈다. 저자는 현미경 같은 눈으로 보고, 다양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격조 있는 식견으로 날카롭게 해부해 나갔다. 보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느끼면서도 명료한 논리로 서술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 울림이 컸다. 마치 그의 글을 읽으며 ‘그래 맞아 그랬었지 하고’한 박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부족함을, 이 책을 읽는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얼마 전 관심 있게 보지 않았지만 희대의 사기꾼 황우석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간들이 더 뻔뻔스러운 경우를 자주 보아왔지만 그의 잘생긴 면상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지난 1월 무슨 공채 시험 출제 위원으로 호텔에 감금된 적이 있었다. 이러저런 얘기 끝에, 다른 분야 출제위원으로 온 50대 중반의 남자가 황우석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에게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황을 두둔했다. 그리고 설득했다. 혹시 세간에서 말하는 지식인 항빠인가 의심했다.

 그는 서울대 농대에 자기 동서가 교수라는 전제를 깔고, 소위 황 죽이기 음모론을 제기했다.  동서에게 본인이 직접 들었다고 했다. 현재 황의 고난이 미즈메디가 황의 줄기 세포를 빼앗으려고 꾸민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주변 지식이 없었던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연출과 인터뷰의 달인이요. 매스컴을 아는 그 인간이 그게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이라는 논리를 들이댔었다.

  이 책의 다음 부분을 보고 그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상력을 배격하라.’에서 “황우석 지지자들의 왕성한 상상력. 누군가 줄기세포 기술을 빼앗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 박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즈메디 음모론, 서울대 음모론에서 CIA 음모론과 유대인 음모론을 거쳐, 프리메이슨 음모론까지 황 박사를 옹호하는 상상력은 참으로 풍부하다.”(107쪽)

   별 근거 없이, 자기가 한 때 믿었던 것에 대해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진중권은 몇 가지 분야에서 황우석 현상을 인용하는데 그 상황이 리얼하고 생생하다. 황이 한창 주가를 날리던 그해 겨울에, 직장 연수로 무창포의 한 여관방에서 황량한 바다를 바라보며, 동료들과 그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TV에서는 황이 수염이 덥수룩하니 여윈 얼굴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저 인간 말 못할 뭔가가 있다. 한 때 나도 황빠였는 데 씁쓸하다.’ 의 요지의 말을 내가 했었다.  옆의 동료의 숨소리가 거치어 졌다. 막무가내로, 황의 연구업적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나의 황에 대한 시니컬한 평가를 비판했다. 국력이니, 어쩌니, 우리나라는 잘 되는 사람을 못 본다는 등,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해댔다.  

   그 날 야간 근무여서 사무실에 있는데, YTN의 뉴스에서 황을 지지하는 논리로 뉴스가 나왔다. 김선종 연구원이 나오고, 그 방송의 미국 현지 취재로 황의 줄기세포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의문이 들었다. 부정적 시각의 보도를 한 mbc가 몰리고 있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조선일보의 신경무가 하는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mbc가 빨갱이 방송으로 매도되고 있었다. 그런데 신화백은 조선의 편집 방향과 딱 맞는 화백이다.

  사필귀정이라는 진부한 말을 들지 않더라도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 얼마 있다가 mbc 후속 취재로 황의 최대 사기극이 백일하(白日下)에 들어나게 되었다. 한 동안 버티던 그가 기자회견을 하였다. “ 사과 기자회견을 할 때 연구원들을 병풍처럼 두른 것도 괜찮았다.” “나는 괜찮은데 이 젊은 연구원들의 미래는 밟지 말아달라.”(108쪽)

  “그 연출 덕분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그의 언어적 호소에 시각적으로 공감했던가. 또 ‘연구 때문에 아내와 헤어지고’라며 순간적으로 살짝 눈물을 핑 돌릴 때, 얼마나 많은 국민이 그를 따라 울었던가.”(108쪽)

 이 책을 보면서 몇 년 전의 사건을 생각해 보았다. 진중권은 예리하게 보고 대구와 비유를 가미해서 탄력적인 문장으로 졸고 있는 우리를 ‘허걱’하게 만드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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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샌드위치 - 서른살 경제학 유병률 기자가 뉴욕에서 보내온 컬처비즈에세이
유병률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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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자로 뉴욕에 체류하면서 ‘문화’에 대해서 고찰한 책이다. 그가 주장하는 요지는 오늘날은 ‘문화의 힘’이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뉴욕이 결코 돈이 많아서 파리, 런던, 도쿄를 밀어 제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선 문화가 경제를 살찌우고 다시 서로 호환해 가면서 뉴욕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컬쳐 비즈의 시대.
 
 개인도 재테크 타령 보다는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미래에는 문화가 개인의 경제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문화의 자리는 돈이 모이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예술이 돈에 눈을 뜨면, 돈은 예술을 살찌운다는 제목 하에서는 뉴욕의 공연문화의 예를 든다.

  옛말에 ‘주식을 하면 하루아침에 망하고, 예술을 하면 천천히 집구석이 거덜 난다.’는 말이 있던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줄곧 ‘문화는 돈’이라는 논리에 의문이 들었다.   동일 뮤직컬을 20년 동안 공연해도 수지타산이 맞는 뉴욕과 우리를 단순 비교한다는 것도 좀 그렇다. 중․고교에서 음악ㆍ미술도 수업 시수가 점점 줄어 서울 미술 교사 모집에 3-4백대 일이란다. 예술대학 나오면 몇 명을 제외하고는 백수 되기 십상이다. 물론 문화는 예술을 포함한 더 큰 개념이기는 하지만.

 ‘창조적 경영’을 강조하면서 ‘코스트코’라는 할인점을 소개했다. 미국에서 월마트보다 사랑받는 곳이 ‘코스트코’라고 한다. 저자의 말을 빌면, 그것은 월마트와 달리 ‘문화적인 할인마트’로 통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무슨 문화 공연이나 예술품 전시를 하는 곳은 아니다.  동네의 소규모 정도의 책을 진열해 놓은 것이 ‘장보기를 즐기러 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우리 대형 할인점도 거의 모든 곳이 책을 진열해 놓았는데 그렇게 환영 받지 못하던데. 원체 책을 보기에는 여유가 없는 백성이라 그런가.

 개인적 생각으로는, 저자의 말대로 발전 단계에서 문화가 경제를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선 경제가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배가 불러야 여타의 것도 보이는 여유를 갖는다. 한 예로, 내가 사는 집 주변에는 시립도선관이 있다. 개관한지 5-6년 되었다. 처음 이 도서관에 대해서 이용자들이 상당히 불편해 했다. 내가 봐도 GDP 3-4만 달러 수준의 도서관이었다. 시설은 당시에 비교적 최첨단 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학생들과 미래의 부동산 중개인들이 학습할 자습 공간이 없었다. 도선관이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우선 취업자리 공부할 곳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뉴욕에서의 밤의 외출은 목숨을 담보해야 된다. 허구한 날 총질이나 하고 강간 및 마약 사범이 날뛰는 암흑의 도시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뉴욕에 대한 인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삭막한 도시에서 문화의 뉴욕으로 알게 되었다. 꼭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 <나는 전설이다>, <투모로우>, <클로버필드>의 배경이 된 도시.(15쪽) 많이 들어 보았던‘맨히튼 샌트럴파크’ ‘티파니에서 아침을’‘오드리 햅번’‘링컨 광장’‘뉴욕 필 하머니’을 보고 싶고 경험해 보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간 글은 웹진2.0 시대의 글쓰기다. 즉‘컬처 비즈의 시대, 왜 글쓰기인가’의 글이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대중을 상대로 개인이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했다. 어떤 절실한 자기만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평가 받고 싶어도 지면 구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특별나지 않는 장삼이사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 당시의 제공되는 지면의 대표적인 매체가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사의 색깔에 맞추고 조작하기 위하여 필자들을 이용하기에 바빴다. 지금은 신문 사설 자체를 보는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가기도 검증받지 못한 유명 필자라는 인간들이, 때로는 독자들을 맥없이 나무라고 자기 의도대로 오도하는 꼴을 누가 본단 말인가. 읽으면 재미있고 힘이 나는 글이 실려 있는 불로거가 넘쳐나는데 말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게 합니다. 취재는 작가나 기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일기를 쓰는 게 아닌 이상, 글 쓰는 사람은 인터넷이든 보고서든 신문이든 책이든 뒤져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관심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생각과 이질적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히려 독서보다 글쓰기를 하면서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이 진짜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뭘 읽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뭘 썼는지는 기억하지 않습니까?“ (189쪽)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 분야에서 돋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182쪽)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글쓰기’에 대한 글 때문이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만 나는 이렇다한 글을 써 본적이 없다. 약간의 여유가 있으면 읽는 방면에 신경 쓰지 독후감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읽은 책을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온 적도 많았다. 앞으로 하루에 한 줄이라도 꼭 써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컬처비즈 시대에 어떻게 써야 사람을 움직이나?(191쪽)  차범근 감독과 강호동의 예를 들면서,“정말 훌륭한 글이군요”하지 않고 “정말 훌륭한 생각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내용입니다”라고 만드는 글을 쓰라고 한다.(192쪽) 더 이상 언어적 유희가 통하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해리포토>처럼 장대한 스토리텔링이 먹히는 시대다. 언어적 수사와 문장기술로 승부하지 말고 글 자체에 주의를 끌지 않으면서 사람을 움직이는 글을 쓰라고 한다.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이다. 요즘 저자의 말대로 요즘 감성어린 여류 작가의 수필을 읽지 않는 걸 봐도 꼭 맞는 말이다. 공부하는 셈치고, 나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서 본문을 많이 이용했다.

- 쓸 건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애기가‘하나마나한’ 애기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두 개의 핵심적 문장이 없으면 하루 종일 한 자도 못 쓴다.

- 글을 많이 써본 사람과 자주 안 쓰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서너 가지를 다 말하려다 한 가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다.

- 버림의 미학을 실천하라.  완성이란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더 떼어낼 것이 없을 때 오는 것.

- 글을 다 쓰고 났을 때 짚어봐야 할 것은 ‘뭐, 빠진 게 없나’가 아니라 ‘빼도 상관없는 단락이 없나’ 불필요한 것들을 골라내고 버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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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약국 갑시다 - 무일푼 약사출신 CEO의 독창적 경영 노하우, 나는 4.5평 가게에서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배웠다!
김성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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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이 책과 차동엽의 <무지개 원리>를 주문하여 외지에서 생활하는 아들아이에게 부쳐 주었다. 읽기나 할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타율적이라도 부담을 주어 그 아이가 책을 가까이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미 그 아이의 책 혐오증에 실패하고 실망한 적도 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해 본다. 나의 바람이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지만 이 책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김성오를 통해 부모의 역할, 무모하다 할 만큼 밀어붙이는 그의 적극적인 의지가 동기 유발이 되었다.

 하기야 나도 책과 조금 가까워진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다.  질풍노도의 청년 시절을 허송세월로 다 보내고 중년이 되어 책을 잡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그렇다고 다같이 ‘바담풍’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편지도 쓰고 멜도 보내고 하여 아들한테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도록 만들어야겠다. 

  좁은 골목 안에 초라하게 웅지를 튼 ‘육일약국’. 많이 알려질리 없는 자신의 약국을 위하여 택시 탈 때마다 반복적으로 외치는 저자가 존경스럽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은 그의 끈기 앞에서는 한낱 소극적인 경구에 불과하다. 가는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마산에서 이 변두리 약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만드는 저자의 저돌적 의지에 감탄했다. 나만 알기보다는, 우리 아들이 이런 일화에 공감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책 주문장을 냈다.

 ‘58년 생으로, 서울대 그것도 약대에 들어갔고, 수능 시험 비슷한 평가에서 전국 4백 몇 등을 한 것은 일단은 그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보아야 한다. 주머니 안에 있는 송곳은 언젠가는 빠져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타고난 능력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헌신의 노력으로 자아실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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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거꾸로 읽는 책 35
김상욱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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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와 책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다른 평균 직장인에 비해서 비교적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독서 멘토링 역할을 해 왔었다. 

 어느 술집에서 약간의 술기운을 빌려 중고ㆍ교의 문학 수업 시간에 대해 비판 했었다. 특히 시를 조가조각 칼질을 해서 설명하는 암기 위주의 수업은 문제라는 주장을 했었다. 이런 행태는 아이들을 시로부터 더 멀리하게 된다는 전제하에 톰 슐만의 『죽은 시인과 사회』에 나온다는 ‘사과 교수법’을 이야기 했다. 즉 키팅 교수가 사과를 들고 교실에 들어 와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와싹 먹어치우 듯이 배우라는 요지다. 사과를 먹으면서 이것에 비타민이 들고 수분은 얼마고 칼로리가 얼마인가를 대부분 따지지 않는다. 시도 그냥 한 입 가득 사과를 먹듯이 읽으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말한, 즉 ‘사과 교수법’은 『죽은 시인과 사회』에 없다고 단언 했다. 키팅 교수가 책을 찢는 장면은 나오지만 ‘사과’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그 일화의 주인공이 톰 슐만의 기팅 교수라고 확실히 믿어온 나는 순간적으로 뻘쭘하였다. 

  도서관 갈 기회가 있어, 거기서 가장 오랜 된 책으로 여겨질 정도로 낡은 그 책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나의 어이없는 기억력이 실망스러웠다.

  한동안 술집 해프닝을 잊고 있다가, 우연히 김상욱 교수의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김상욱의 <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를 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어 선택하게 된 시 평론집이다. 추워진 날씨에 마음을 다잡으며 이 책을 읽다가 ‘시와 사과’라는 부분에서 나를 혼란시키는 구절을 발견했다.

  바로 내가 출처를 잘못 알고 있었던, ‘사과를 먹듯이 시’를 읽어야 한다는 교수법이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부연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김상욱이 고교 시절, 유일하게 존경했던 국어 샘의 첫 번째 수업 시간에 배운 시 감상법이었다. 

 약간 변형하여 부분적으로 인용하면 이렇다.  “ 우리는 지금껏 학교에서 시를 배워왔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왔는가? ---- 시의 형식을 나누고, 운율을 따지고,--- 시험에 하나 더 맞추려고 외기에 급급했다. 시를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여기 사과가 있다. 우리는 사과를 먹을 때---  이것은 껍질이고, 이것은 과육이며, 이것은 비타민C라고 혓바닥으로 나누고 ----  우리는 그저 ‘와싹’ 깨물어먹을 따름이다. 선생님은 먼저 사과를 게걸스럽게 베어물고, 우리에게 건넸다. 맛있지? 시 역시 마찬가지다. 나누고 쪼개고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과를 먹듯 와싹 먹어치우는 것이다”(45쪽)

  참고로 김상욱 교수는 ‘61년생이다. 이 분의 책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다.  이 ’사과‘ 이야기가 어떠한 경로로 나의 머리에 와 박혔는지 의문이었고, 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자신이 확고하다고 믿는 사실도 가끔은 완전히 틀리고 혼동이 올 수도 있다. 술자리에서 제 고집만 내 세우지 말고 확인하고 다시 알아보아서 풀어 가야 한다. 머리 나쁜 내 기억력도 문제지만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서정주를 소개하는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역시 서정주는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군!”하고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반어적인 표현이었다. 

 요즈음은 국가의 잘못된 현안에 대해 가장 먼저 거세게 반응하는 세력으로 문인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알아서 기었다. 그들은 심약해서 그런지 몇 분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별다른 저항 없이 창씨개명하고 일본 제국주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친일한 문인들을 모두 제외하면 중고의 문학 시간에 공부할 내용이 없을 것이다. 누구는 그것도 역사라고 합리화 한다.

 유독 서정주는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 있는 쪽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락을 추구해 갔다. 서정주는 전대머리가 피를 부르는 혈전을 동족에게 치루고 권좌에 올라 미소를 지었을 때 ‘단군 이래 최대의 미소’라고 극찬했다고 한다.(72쪽) 박목월이 육영수 여사의 시비를 짓고 제 살기에 바빴다는 말은 들었어도 몰랐던 사실이다.

  물론 그의 친일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본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라는 적극적 친일을 하는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조국(?) 일본을 위해 꽃다운 젊은 넋을 송두리째 귀축영미(鬼畜英美)의 군함에 내어던진 조선인, 그러나 창씨개명을 한 마쓰이 히데오의 영웅적 죽음을 절절히 노래한 이 시는 절창에 가깝다.”고 조소하고 있다.(75쪽)

  사실여부의 문제에 약간의 의문을 저자도 품고 있지만, 전두환으로부터 ‘未堂’말고 그는 호를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 때 영부인이었던, 승복 차림에 염주를 돌리고 있는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누구의 시를 가장 좋아하냐고? 그녀는 냉큼,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말당(末堂) 서정주라고, 전 그 시인을 좋아해요. 말당이 쓴 시. <국화 옆에서>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에요’라도 대답했다는 것이다.(76쪽) 한 참을 웃었다. 이화여대 재원이었는데 우찌 그런 일이. 쩝.

 내가 좋아했던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라는 시가 있다. 그가 6.25 전쟁 통에 광주에 피난 내려가서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쓴 시다. 입는 것, 먹을 것 등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대에, 의연하게 꿋꿋이 서 있는 ‘무등산’을 보며 극복해 간다는 내용의 시다. 무등산이 ‘지초와 난초’의 꽃을 품고 기르듯 비록 가난한 부부지만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록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즉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품성을 읽지 말자고 노래한다.

  이 책에서는 이 시를 비판하다. ‘아닙니다. 서정주는 틀렸습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항변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그가 귀족적 삶을 살고 정작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이 남루한 옷을 벗어 던지듯 가볍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가난은 심성을 파괴할 수도 있고 피부 빛깔도 바꿀 수 있다고 서정주의 가벼운 생각을 질타한다.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지 사생활까지 넘보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독일의 나치 전범을 현재도 지구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고, 재판에 회부한다는 사실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연결시키며 너무 오버하는 것인가?     

  시와 시인을 다른 방면에서 접근해 가는 부분이 색달랐다. 서정주 외에 박목월, 김남조, 황동규 및 도종환도 기존의 평론과 다르게 해석하여 놓았다. 신경림의 구렁이 담 넘어 가듯한 시와 시인의 평가와는 다르게 확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또한 유종호 교수의 ‘울림이 크다’라는 둥 ‘술 덤벙 물 덤벙한 애매한 해석’이 지겨우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정말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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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上 - 사람에게 비추어 시대를 말하다, 고전을 넘어선 고전 강의
사마천 지음, 이인호 옮김 / 천지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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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마천의 <사기 열전>이 불후(不朽)의 명작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나도 한 때는 <사기 열전>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특히 <열전>은 몇 번씩 독회를 했고,  그 글의 숨은 뜻을 알기에 노력 했었다. 또한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번역본을 사서 모아 소중하게 간직하며 애지중지 했었다.

  당시에 <사기열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사마천의 지혜를 통찰하고 내면화 할 수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내용도 많이 잊었고, 이에 관련된 책도 어저께 간신히 다 찾아내 먼지를 털 수 가 있었다. 그렇지만 사마천 자신이 혼신의 힘으로 영혼을 불어 넣어 탄생시킨 인물들은 다시 그 책을 뒤적이는 지금 이 순간에, 생생하게 나에게 걸어 나오고 있다.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신분의 거지, 도둑에서 부터 높게는 그 시대를 풍미 했었던 재상들 까지 누구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자들이다. 

  내 기억으로는, 90년대 말 부총리를 지낸 조순이 <사기열전>을 이렇게 극찬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친구도 여러 명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본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 줄 수 있는 관중과 포숙아 같은 이는 드물다. 책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가치 있고 우리의 인생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몇 권 안 된다.  그 몇 권 안 되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사기열전> 이다.”  라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여러 책을 헤매다가 결국 고전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많은 책을 읽지만 고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이 말을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고개가 끄덕여 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30년이 지나지 않은 책을 읽지도 말라고 했다. 오랜 세월 검증을 받은 책을 읽으라는 뜻이리라. 우리 모두, 늘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고전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자. 

 오늘 시내의 서점에 갔다가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인호 교수의 신간 <사기열전>을 발견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아직 (상) 밖에 출판되지 않았다.  이 책의 표지를 자세히 보니 상ㆍ중ㆍ하로 계속 출간한다고 고지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앞부분을 대충 읽어보니, 이 책의 구성은 독특했다. 각 인물에 대한 분류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큰 틀을 짰다. 첫 번째는 각 열전의 취지와 주제를 해설하고, 두 번째는 각 열전의 내용을 명료하게 축약했다. 마지막으로 ‘고전을 넘어서 고전 읽기’에서 각 열전에 담긴 풍부한 행간의 의미를 다각도로 해설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 번째 부분이 이 책의 압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인호 교수의 프로필을 보니 이 분의 삶 자체가 사마천이었다.  수십 년간 『사기』 연구에 몰두했고, 석ㆍ박사 학위도 사마천 연구로, 오랜 세월을 거쳐 대만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흔할 말로 『사기』의 달인이라고 칭하고 싶다.

   첫 장을 훑어보았을 때, 문장도 수려하고 사마천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집고 있었다.  ‘사마천이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을 역자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뒷부분에서 아주 명료하게 해설하여 놓았다. 아니 이 책의 표지에는 역자가 아니라 ‘새로 씀’으로 되어 있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고, 창의적인 의미의 확장이 가미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독자가 있는지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딱 한 분이 있었다.  이 리뷰를 쓴 분은 『사기열전』을 엄청 좋아해서, 6질의 각각 다른 출판사의 책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모은 책을 이제 다 처분해 버린다고 한다. 왜? 이 책이 나왔기 때문에 다른 판본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 매료되었다는 강력한 어필이었다.

 허나 내가 가장 선호하는 <사기열전>은 건양대 김원중 교수의 것이었다. 김교수의 이 책은 처음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다가, 근래에 민음사에서 상ㆍ중ㆍ하로 다시 증보판으로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김 교수의 책도 재판을 몇 번을 갈아치운 전력이 있는 인기 도서이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추천한 것을 비롯해서 각종 기관에서 선정도서로 인지도가 높다.

  김 교수의 ‘민음사’ 판이냐 이교수의 ‘천지인 ’판이냐. 어느 것이 사마천에 가장 가까게 다가 갈 수 있었을까.  이렇게 단순 비교해서 순위를 논하는 자체가 나의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각기 번역한 분들의 열의와 인고의 산물이므로, 나름대로 각각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교수의 <열전> 중, ‘백이열전’ 편에서  미묘한 해석의 이견(異見)을 제시했다. 일찍이 조선시대 성삼문이 처음으로 ‘백이열전’에 시비를 걸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시조 종장에서“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라고 일갈하여, 자신의 절개와 의로움이 백이․ 숙제보다 우위에 있음을 만 천하에 알린 것이다.

  열전 원문, ‘義不食周粟’에서 ‘粟’의 해석 문제를 가지고, 이 교수는 다른 역자들을 힐책한다. “기존 『사기』 번역본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문만 해독하면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번역자들의 순진한 발상에 있다. 의욕과 사명감을 나무랄 바 없으나 의욕과 사명감만으로 번역이 온당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중략) 번역이란 해독 능력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고 , 무엇보다도 <사기>와 사마천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것이다.”(53쪽) 

원문의 이 ‘粟’을 각 어떻게 해석 했기에 문제인가. 이 교수는 이 ‘粟’자를 “주나라 치하에서 관직에 진출하여 복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한 주나라 무왕을 천자로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이다.”(52쪽)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다른 책은 어떻게 했을까. 저자는 일일이 출판사 별로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즉 요약하면  ‘민음사’, ‘ 까치 출판사’는 ‘곡식이나 양식’으로 그 중 집문당 번역 본 만이 이 교수와 비슷한 해석을 하였다 한다.  그는 집문당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본은 온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설에 가깝다”(53쪽)라고 강조 한다.

  글쎄다. 이에 ' 역자의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아닌 가' 하는 견해를 감히 제시해 본다.  넓게 보아서는 약간의 의역의 차이 만 존재할 뿐 동일한 뜻이라는 것이다. ‘粟’을 ‘곡식이나 양식’으로 번역한 것은 ‘채미’(采薇)와 균형과 조화를 맞추려 한 것이 아닌지. 즉 주나라에서 주는 양식을 거부하고 고사리만 캐서 먹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이인호) 주장하는 ‘주나라에서 복무하지 않겠다.’ 으로 보아야 된다는 주장도 주나라에서 복무하면 녹봉이 나오고 그것으로 생활하면 안 되는 것이니 마찬가지 아닌가.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관련된 책은 다양한  방법으로 출간되고 있다. 회사 경영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응용까지 여러 각도에서 현대화하여 소개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의 울림이 크고 그림자가 길다는 뜻이라 본다. 다양한 판본을 비교해서 꼼꼼히 반복해서 읽어 보면, 삶의 지혜를 얻게 되고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이 책을 강력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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