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거꾸로 읽는 책 35
김상욱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친구와 책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다른 평균 직장인에 비해서 비교적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독서 멘토링 역할을 해 왔었다. 

 어느 술집에서 약간의 술기운을 빌려 중고ㆍ교의 문학 수업 시간에 대해 비판 했었다. 특히 시를 조가조각 칼질을 해서 설명하는 암기 위주의 수업은 문제라는 주장을 했었다. 이런 행태는 아이들을 시로부터 더 멀리하게 된다는 전제하에 톰 슐만의 『죽은 시인과 사회』에 나온다는 ‘사과 교수법’을 이야기 했다. 즉 키팅 교수가 사과를 들고 교실에 들어 와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와싹 먹어치우 듯이 배우라는 요지다. 사과를 먹으면서 이것에 비타민이 들고 수분은 얼마고 칼로리가 얼마인가를 대부분 따지지 않는다. 시도 그냥 한 입 가득 사과를 먹듯이 읽으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말한, 즉 ‘사과 교수법’은 『죽은 시인과 사회』에 없다고 단언 했다. 키팅 교수가 책을 찢는 장면은 나오지만 ‘사과’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그 일화의 주인공이 톰 슐만의 기팅 교수라고 확실히 믿어온 나는 순간적으로 뻘쭘하였다. 

  도서관 갈 기회가 있어, 거기서 가장 오랜 된 책으로 여겨질 정도로 낡은 그 책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나의 어이없는 기억력이 실망스러웠다.

  한동안 술집 해프닝을 잊고 있다가, 우연히 김상욱 교수의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김상욱의 <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를 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어 선택하게 된 시 평론집이다. 추워진 날씨에 마음을 다잡으며 이 책을 읽다가 ‘시와 사과’라는 부분에서 나를 혼란시키는 구절을 발견했다.

  바로 내가 출처를 잘못 알고 있었던, ‘사과를 먹듯이 시’를 읽어야 한다는 교수법이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부연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김상욱이 고교 시절, 유일하게 존경했던 국어 샘의 첫 번째 수업 시간에 배운 시 감상법이었다. 

 약간 변형하여 부분적으로 인용하면 이렇다.  “ 우리는 지금껏 학교에서 시를 배워왔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왔는가? ---- 시의 형식을 나누고, 운율을 따지고,--- 시험에 하나 더 맞추려고 외기에 급급했다. 시를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여기 사과가 있다. 우리는 사과를 먹을 때---  이것은 껍질이고, 이것은 과육이며, 이것은 비타민C라고 혓바닥으로 나누고 ----  우리는 그저 ‘와싹’ 깨물어먹을 따름이다. 선생님은 먼저 사과를 게걸스럽게 베어물고, 우리에게 건넸다. 맛있지? 시 역시 마찬가지다. 나누고 쪼개고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과를 먹듯 와싹 먹어치우는 것이다”(45쪽)

  참고로 김상욱 교수는 ‘61년생이다. 이 분의 책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다.  이 ’사과‘ 이야기가 어떠한 경로로 나의 머리에 와 박혔는지 의문이었고, 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자신이 확고하다고 믿는 사실도 가끔은 완전히 틀리고 혼동이 올 수도 있다. 술자리에서 제 고집만 내 세우지 말고 확인하고 다시 알아보아서 풀어 가야 한다. 머리 나쁜 내 기억력도 문제지만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서정주를 소개하는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역시 서정주는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군!”하고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반어적인 표현이었다. 

 요즈음은 국가의 잘못된 현안에 대해 가장 먼저 거세게 반응하는 세력으로 문인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알아서 기었다. 그들은 심약해서 그런지 몇 분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별다른 저항 없이 창씨개명하고 일본 제국주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친일한 문인들을 모두 제외하면 중고의 문학 시간에 공부할 내용이 없을 것이다. 누구는 그것도 역사라고 합리화 한다.

 유독 서정주는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 있는 쪽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락을 추구해 갔다. 서정주는 전대머리가 피를 부르는 혈전을 동족에게 치루고 권좌에 올라 미소를 지었을 때 ‘단군 이래 최대의 미소’라고 극찬했다고 한다.(72쪽) 박목월이 육영수 여사의 시비를 짓고 제 살기에 바빴다는 말은 들었어도 몰랐던 사실이다.

  물론 그의 친일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본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라는 적극적 친일을 하는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조국(?) 일본을 위해 꽃다운 젊은 넋을 송두리째 귀축영미(鬼畜英美)의 군함에 내어던진 조선인, 그러나 창씨개명을 한 마쓰이 히데오의 영웅적 죽음을 절절히 노래한 이 시는 절창에 가깝다.”고 조소하고 있다.(75쪽)

  사실여부의 문제에 약간의 의문을 저자도 품고 있지만, 전두환으로부터 ‘未堂’말고 그는 호를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 때 영부인이었던, 승복 차림에 염주를 돌리고 있는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누구의 시를 가장 좋아하냐고? 그녀는 냉큼,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말당(末堂) 서정주라고, 전 그 시인을 좋아해요. 말당이 쓴 시. <국화 옆에서>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에요’라도 대답했다는 것이다.(76쪽) 한 참을 웃었다. 이화여대 재원이었는데 우찌 그런 일이. 쩝.

 내가 좋아했던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라는 시가 있다. 그가 6.25 전쟁 통에 광주에 피난 내려가서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쓴 시다. 입는 것, 먹을 것 등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대에, 의연하게 꿋꿋이 서 있는 ‘무등산’을 보며 극복해 간다는 내용의 시다. 무등산이 ‘지초와 난초’의 꽃을 품고 기르듯 비록 가난한 부부지만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록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즉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품성을 읽지 말자고 노래한다.

  이 책에서는 이 시를 비판하다. ‘아닙니다. 서정주는 틀렸습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항변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그가 귀족적 삶을 살고 정작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이 남루한 옷을 벗어 던지듯 가볍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가난은 심성을 파괴할 수도 있고 피부 빛깔도 바꿀 수 있다고 서정주의 가벼운 생각을 질타한다.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지 사생활까지 넘보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독일의 나치 전범을 현재도 지구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고, 재판에 회부한다는 사실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연결시키며 너무 오버하는 것인가?     

  시와 시인을 다른 방면에서 접근해 가는 부분이 색달랐다. 서정주 외에 박목월, 김남조, 황동규 및 도종환도 기존의 평론과 다르게 해석하여 놓았다. 신경림의 구렁이 담 넘어 가듯한 시와 시인의 평가와는 다르게 확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또한 유종호 교수의 ‘울림이 크다’라는 둥 ‘술 덤벙 물 덤벙한 애매한 해석’이 지겨우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정말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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