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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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서 소개된 책이라 읽게 되었다.  유시민은 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번에 해당하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이 책을 선정했을까.  절판 본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영웅, 노통을 염두(念頭)에 두었을 것이다.

 

 


이 책은 언론의 폭력 문제를 다루었다.  아주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 관리사의 인생을 조폭 언론이 어떻게 망쳐놓는가를 건조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즉 성실하게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은 뜻하지 않는 조폭 언론이 들이대는 비수에 처참히 짓밟힌다는 내용이다. 그녀가 종국(終局)에는 그 기자를 총으로 쏴 죽여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것은, 이 책을 읽은 보답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큰 기쁨이지만, 대체로 답답하고 우울함을 감출 수 없다.

 

 


이 책은 1975년에 발표 되었는데, 이 글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온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으면 환호하며,  달리하면 침소봉대하고 왜곡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신문이, 분명히 현재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안다. 

 


우리나라의 <차이퉁>에 해당하는 신문들은 극우적인 사고와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조롱한다. 최근, 법원 판결이 지들 마음에 안든다고  가차 없이 담당 판사 사진 등을 공개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식이 올바로 박혔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의 무모한 작태를.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이 설정한 아젠다에 말려들어 가서 끝내는 제 발등을 제가 찍는 자승자박을 초래하기 쉽다.

 

 

 

 특히나 현 정권에 들어서는 마치 보수 언론이 정치를 하는 것으로 착각할 경우가 종종 있다. 오히려 검찰이나 정치권이  우리나라 <차이퉁>지에 해당하는 신문에 잘 보이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하면 너무 거친 표현인가. 하여튼 보수 신문, 그들은 막강하다. 세계적으로 종이 신문이 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그들에게 조금만한 불평이라도 하면, 지면을 키우고, 줄이며, 며칠 보도하여 당사자를 초토화 시키고 무장해제 한다. 

 

 

 

어떤 신문 사주 놈이, 전두환 때 자기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했다고 하던데, 나는 ‘밤낮의 제왕’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 독재 정권의 비호아래 급성장한 우리의 <차이퉁>이 오늘도 열심히 왜곡하는 현실을 아는 사람은 가슴 아파 한다. 철부지 어버이 연대만 빼놓고 말이다.

 

 

무고한 카타리나가 거대 신문에 의해서 당할 때의 상황은 우리와 아주 똑 같다. 그녀가 수사팀에게 끌려가 신문을 당하는데, 여기서도 ‘빨대’가 등장한다.  마치 노통이 당할 때 검찰에 보수 신문에 잘보이려는 ‘빨대’가 있었듯이 말이다. 그들은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언론의 사명을 빙자하여 힘없고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을 짓밝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성공하며, 입신양명하여 자손 대대로 부를 누리는 자들이다.   

 

 

카타리나가 근검절약하고 대출을 받아서 산 아파트가 소설 속에서  이슈로 떠오른다.  조폭 언론에 의해서, 빨갱이가, 가정부인데, 어떻게 저런 좋은 아파트를 소유했는가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거기에 <차이퉁>의 기자가 있다. 결국에는 시원스럽게 총 맞아 죽지마는, 그는 이렇게 왜곡하고 자기 마음대로 윤색한다.

 

 


‘그녀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다’는 지인들의 인터뷰를‘그녀는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 로 슬쩍 바꾸어 버린다.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로 (107P)로 교묘히 말은 바꾸어 보도하여 그들의 먹이 감을 단숨에 비호감으로 만들어 버린다. 

 

 

 

 

 

언론의 자유는 어디까지 인가. 언론의 역할을 무엇인가. 이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참으로 고상한 물음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이다. 코드가 맞는 정권에 따라서.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자기와 코드가 맞는 권력은 비호하고 용비어천가를 매일 부루며 찬양한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소설 속의  <차이퉁>은 어느 신문이 해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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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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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백’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등장인물 각자가 서로 고백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등장  인물들이 일기를 쓰듯 자신 입장에서 사건에 대해 호소하는 수기체 독백 형식이다.

 

 

 

각 장(章)은 궁서체로 ‘성직자(聖職者), 순교자(殉敎者)’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무슨 종교 소설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책을 일단 열어 보면,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마력을 지녔다. 화자가 각각 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이야기의 맥이 끊어지지 않나 하는 염려는 노파심에 불구했다. 오히려 이렇게 챕터를 인물에 따라  구분해 놓아 등장인물이 더 살아있고, 호기심 흥미를 유발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옴니버스 스타일’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소설은 그냥 평범하게 시작된다. 모리구치라는 교사가 학교를 떠나면서, 봄방학을 앞둔 자기 학급의 아이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다. 이런 저런 그동안에 있었던 일화와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한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작별 인사 말미에  가서 이 소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폭탄선언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인 나오키와 슈야라는 두 학생의 운명이 걸린 말이었다.  과연 그들은 무슨 짓을 저지FMS 것인가?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독자들이 이 두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나쁜 놈으로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점차 진도를 나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경제적으로 우리는 일본을 약 10여년 뒤에서 쫓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  뿐만이 아니다. 학교 문화도 똑 같다고 보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일본은 왕따의 종주국이다. 히키고모리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나라이다. 모리구치 담임 반 아이들이 슈야라는 동료를 괴롭히는데, 자기들 말로는 처벌이라고 하지만, 아주 체계적이다. 괴롭히는 강도를 학생들 각자 앞으로 포인트화 하여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영악함을 들어낸다.

 

 

우리 사회에서도 히키고모리도 벌써 시작되고 있다. 부모들의 과보호도 약간은 문제가 있지만,  취업난 등 막막한 미래 때문에, 할 일라고는 겜 밖에 없어 점차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급속한 산업화와 물신주의는 이들을 더욱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카인과 아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오키와 슈야도 전혀 환경적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나오키는 자기의 꿈만 찾아가려는 부모의 무관심과 욕심이 자기중심적인 반 사회인으로 가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슈야는 어머니의 턱없는 과보호와 성적 지상주의적 관심이 오히려 그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기야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전적으로 범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폭력과 살인을 하는 영화만 보았다고 꼭 그런 범죄를 행사한다고 볼 수 없는 경우와 동일하다.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전자공학 이야기뿐이었다. 엄마 꿈은 발명가였어” “와타나베, 다음에 우리 집에 꼭 놀러와, 1등하는 애?하고 우리 엄마가 기억하고 있더라고, 그러면서 꼭 데려오래.”(168P)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사건은 평범한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하다. 일본 소설 특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자극적이고 끔찍함이 그대로 들어나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찌르고 잘라서 죽이며, 피를 튀기는 엽기 추리 소설은 아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렬하다.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내용은 무겁고 그 충격이  만만치 않다. 집중이 안 될 때. 또는 한없이 인생이 권태롭게 느껴질 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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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용후기 - J. 스콧 버거슨의
스콧 버거슨 지음, 안종설 옮김 / 갤리온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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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말에 의하면, 2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개발 논리를 내세우는 후보를 서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많이 찍었다고 한다. 나는 충청도 지방에 거주하는 관계로 알 수는 없지만 자기 집 값 올려준다는데 마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제는 문제 제기 하는 사람도 없다. 부수고 다시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과정이 반복 된다. 일본이나 영국은 옛 건물을 잘 보존한다고 하는데, 특히 영국은 오래되고 손 때 묻은 집을 더욱 소중히 한다고 어서 읽은 것 같다. 좀 불편하더라도 전통을 중시하고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들이 생각 날 때가 있다. 중국에도 무슨 거리라 하여 골목길도 관광 자원으로 개발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주장 했다가 맞아 죽기가 십상이다. 집 값 떨어진다고 말이다. 버거슨의 문제 제기가 순수하고, 돈 되면 무엇이든 하고 보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순진하기 까지 하다. 

 

 

현재 정치권은 수도 이전 문제로 야단법석이다. 정모씨라는 양아치 형님이 앞장서서 총대를 메고 나섰다. 평소 해오던 그 분 행태를 보면, 아예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지, 오히려 행정부처 이전을 찬성했을 것 같은데, 완장차는 관리가 되더니 무대뽀이다.  마치 무슨 행정수도 이전 수정안 전도사 같다. 추해보이고, 한 편으로는 불쌍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자기의 소신이 약해지고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더니 그 양반에게 딱 맞는 설명이다. 그는 돌아다니며 행정 부처가 하나라도 이전하면 나라가 거덜 난다고 하여 뭇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나라가 행정수도 이전이 나라가 거덜날정도면 전에라도 자기 소신을 이야기 하며 막았어야 하지 않나.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수장으로 있을 때, 공인으로서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고 문제 제기를 했어야 옳지 않았나. 그는 권력에 뜻이 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것   저것 안 가리고 발을 담구는 하나의 정치인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행정 부처를 이전을 수십 번 강조해서, 표를 얻어 넣고, 공약으로는 무슨 말을 못하느냐고 생까는 분은 무엇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무슨 청남대  뒷산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며 반성했다고 하다가 뒤퉁수 갈길 때 알아봤지만 말이다. 탄핵을 당하더라고, 자기 신념이 옳다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나는 좋다. 허언을 밥 먹듯이 하고, 국민을 호구로 아는 관리들을 정말 싫어한다. 충청권 사람들이 요즈음 몸소 체험하는 옛 말이“조변석개(朝變夕改), 조령모개(朝令暮改), 조선공사 삼일을 못 간다.”이다. 수도권에 올인 하는 그들이 저주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무시당하고 천대 받으면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이해 안 간다. 그들은 둘 중의 하나다. 더 이상 이야기 안 해도 짐작이 갈 것이다.

 

 

 

이 글을 쓰다가 우연히 인터넷 신문을 보니 노통의 지역 균형에 대한 제주도 연설이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그는 작금의 상황을 정확히 예상한 듯 하는 발언이 전율을 느끼게 했다. “이제 제가 더 이상 균형발전정책을 지킬 수가 없다” “국민(여러분)이 지켜 달라” “지방 사람도 서울사람 만큼 그 이상으로 대우 받으며 그렇게 살 수 있다” 이 부분 만 가지고 말 할 때, 정말 그는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였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자기 철학이 있는 신념의 지도자였다. 자기가 불리해지면 협력하고 동조하는 듯하다가, 잠잠해지면 가차 없이 내쳐버리는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참으로 따스한 지도자였다.

 


또 보수 신문에는 박근혜의 신뢰라는 칼럼을 실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신뢰를 충실히 지키는 자인데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신뢰라는 최고의 덕목도 자기들 이익에 반하면 가차 없이 의미를 평가 절하하려는 자들이다. 말해 무엇 하나 그것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한심할 뿐이다.    

 

 

왜, 이리 서론이 길어졌나 하면,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즈음 우리나라 서울에서 벌어지는 개발논리에 대한 저자의  염려에 공감이 어느 정도 가기 때문이다. 고택으로서 정취 있는 한옥이 눈 깜작 할 사이에 재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사라짐을 저자는 안타가워 한다. 

 

 

 

 

“2005년 한 해 동안에만 종로 내 숙소 부근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한옥 세 채가가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10년도 못 갈 것 같은 볼품없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이제 내 숙소 앞 골목길에 한옥이라고는 딱 한 채밖에 남지 않았는데, 가격만 적당히 맞아 떨어지면 그 집 역시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질 게 뻔하다.(40p)

 

 

 

 

“도덕주의자, 돈에 눈먼 개발업자, 도심의 고급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중략), 솔직히 성인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성(性)을 사고파는 것과, 단지 돈을 벌려고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강간하는 것, 둘 가운데 무엇이 더 나쁜지는 선뜻 판다하기 어렵다." (57p)

 

 

 

 

어느 보수 신문에서 서평을 담당 기자는, 버거슨이 한국 여자한테 채여서 그런 부정적 얘기를 한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버거슨의 주장이 치기어리고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부분은 올바른 지적으로 보이다.

 

 

 

 


한편으로는, 버거슨은 자기만이 한국 관련의 책을 써야 된다는 듯, 다른 외국인의 한국에 관해 쓴 글에 몽니를 부린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일본 대사관 앞 농성을 보고 이에 동조하는 메이어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선 한국인 부역 남성이 젊은 여성을 징발하는 일본인을 능동적으로 도와 사신의 자매를 팔아넘겼고, 그것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고, 장님 코끼리 만지 듯 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꼴이다.

 

 

어쨌거나 버거슨은 다른 외국이 한국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다. 심심해서, 미국에서 할 게 없어서, 잠시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나 하면서 마약이나 먹고, 풍기 문란을 일으키는 자들과는 구분되어야한다. 즉 그가 비록 격정에 휩싸여 치기어린 한국에 대한 비판이라도 경청해야 될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경주 다방 사건’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 내용이다. 몇 년 전의 추억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작업 걸려고 찾은 다방의 대접이 소홀하자, 그가 분노하며 끌어다 부치는 견강부회의 논리는 한 편의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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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역사: 이브, 그 이후의 기록 - 하이힐, 금발, 그리고 립스틱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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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의 이치에 따라 이성간의 끌림은 당연한 것이다. 남녀가 서로 이성간에 잘 보이려고 하고, 그런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진화시킨다.  그러면서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

 

 

 저자는 본이도 여자이면서, 여성들이 어떻게 끈임 없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노력하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여성들의 외모를 위한 노력은 결국 남성을 유혹하려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화장을 하고 옷을 야하게 입던 단정하게 차리든 모든 행위는 이성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화끈하고 노골적인 사진도 제시하여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해가 갈듯하면서도 너무 편향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워지려는 여성의 본능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이성을 후리기 위한 방편이란 말인가?

 

 

“남자들은 여성적인 매력을 부각시킨 여자들을 보며 그야말로 ‘백기’를 든다. 자신을 꾸미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욕망과 그것을 환호하는  남자들의 취향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훌륭한 자식을 낳아서 잘 키우고 여자들이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것도 결국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12p) 이런 것이 결과적으로는 인류가 계속되게 한 것인가.

 

“이중 구속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신호를 동시에 내보내면서 상대방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구속하는 상태를 의미한다.”(39p)


“남자의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지는 여자는 드물지만 남자는 여자의 외모만 보고도 여성에게 매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여자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외모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가.”(42p) 일단은 여성은 잘생기고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박한 사고라고 매도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간혹 시대에 따라서 능력 있는 여성을 더 원하기도 하지만.

 

 

“고대 여인들이 발정기 동물의 분비물을 몸에 바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남성의 주목을 끌었다면 교육 수준이 높은 현대 여성들은 향수를 뿌려 남자들을 유혹한다. 오늘날의 이브들은 청초한 향, 그래서 남자들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는 병 속의 향기로 온몸을 휘감는다.”(74p) 행위는 다르지만, 고대 여인들도 배란기 등 이성이 그리울 때, 온갖 방법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여러 자료 등을 이용하여 설득력을 높이려 했지만, 왠지 산만하여 읽기가 불편했다. 단원도 에매 해서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핵심 쟁점을 명확히 하고 내용 구분을 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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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조경수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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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는 교사가 많다. 친구도 몇 명 있고, 집안에 제수씨서부터 시작해서 웃어른 까지, 중 ․ 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이 많아서, 행사 때 모이면 결론 없는 교육 이야기를 많이 한다. 교사 집단이 30만이 넘는 거대 조직인 것으로 알고 있고, 아이들이 없는 집이 드무니 서로 통하는 마침맞은 소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사를 긍정적으로 보다는 비판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니, 거의가 눈에 독기를 품고 자기 아이의 담임 또는 학과 관련 샘을 못 마땅해 하고 심지어는 증오한다.  거기에 상당한 구체적 사례까지 들어서 실감나게 말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공분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반성할 점도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거대 조직으로서, 다른 집단 보다는 그래도 도덕적인 마지노선을 지키며 박봉에 열심히 한다고 보지만 말이다. 우선 사교육에 많은 부분을 내주고 있는 현실은 변명에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권력에 좌지우지 되고, 거듭 되는 미봉책에 불과한 교육 정책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네 아이를 둔 독일 아줌마 로테 퀸의 교사 비판은 아주 신랄(辛辣)하다. 우선 책 한 권에 해당되는 교사 비판 서(書)니 분량 면만 보도라도 얼마나 방대한가.      우리나라 교사들이 이 책을 꼭 읽고 성찰해야 한다고 본다. 참으로 교사의 사회적 책무가 얼마나 무겁고, 선생들 언행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지 읽고 통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 부록에서 누가 얘기했지만,  독일과 우리나라 학교하고 어쩌면 그렇게 모든 상황이 똑 같은지 놀랐다.  

 

 


 한편으로는, 로테 퀸이 직장 생활도 하면서, 네 명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다보니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아이들의 육아 스트레스를 모두 샘들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쟁점을 부각시켜서 책을 팔아먹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모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며 견강부회하는데 발군(拔群)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는 우선 교사에 대한 선입감을 가졌고, 어떠한 경우라도 선의로 보고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자기 아이들을 맡는 교사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직업이 져널리스트라 그런지, 하던 버릇에 그녀의 본성을 드러내어 자기 아이들 교사에 대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각 소 단원 쟁점이 되는 글로 들어갈 때, 이렇게 교사를 묘사하는 글로 시작한다. “ 사냥개 같은 눈빛의 수학교사, 한 번 거드름을 피우며, 교활한 눈빛의 교사가,  우쭐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말한다,” 교사가 자세히 설명하면 “교사들은 끈질긴 수다로” 받아들인다. 급기야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갖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이라고 이해하는 개념을, 저자는 아이들을 ‘이용’한다고 비판 한다

 

 

누가 학부모 회의에서 가지 의사에 반하는 표현을 하면, “ 학부모 대표에서 찾아낸 어수룩한 학부형에게 끝없이 보고하게 해서”로 판단한다. 즉 저자는 학교의 정책에 학부모가 수긍하면 아첨꾼으로 몰아붙이고, 교사에 조금이라도 호의적으로 보이면 가차 없이 겁쟁이라 규정해 버린다. 아주 부정적 사고방식에 저 잘났다는 말 밖에 안 된다. 교사를 비판하다가 모자라니 자기와 똑같이 교사를 몰아붙이지 못하는 학부모를 욕하고 비난한다. 이런 여자 두 명만 있으면 학교 거덜 난다.

 

 


“‘짧은 다리’ ‘뚱뚱한 배를 내밀며 삶을 살아간다 ’ ‘골초인데다 그의 입 냄새를 학생들이 역겨워한다’ ”  (91p) 특히 아이도 지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참을   성도 드럽게 없다. "진짜야, 엄마, 그 선생님이 뒤에서 내 위로 몸을 숙이면 토할 지경이라니까.”(91p)  나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냄새가 더 나던데. 공부하느라 잘 안 씻고 그래서 그런지 여학생들도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런데 참고 이해한다. 아이들이 성장기에 있고 힘들게 공부한다는 사실로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채취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저자는 두 번이나 교사의 냄새에 대해서 지적하고 역겨워 한다. 교사들이여, 잘 씻고 향수를 쓰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의 부록에 학부모 연대 대표되는 분도 교사의 옷차림을 지적했는데 왜 그것이 문제인지 이해가 안 간다. 그 분은 교사가 똑 같은 옷을 삼일 이상 입고 오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교사가 무슨 옷을 입던지,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오히려 교육적이지 않은가. 동서양의 학부모가 통하는 게 있는지 저자도     교사의 옷차림도 지적한다. “코르덴바지와 다리지 않은 셔츠 등등” 혹시 저자가   갱년기 우울증 아닌 가하는 의심이 든다.

 

 

 

이런 사례도 있다. “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책임감 있게 예산을 운용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좋은 방법을 교사들이 가로챈다. 즉 교사가 모든 아이들을 위해 직접 공책을 사겠다고 우기며 학부모에게 매달 돈을 걷는다. ”(21p) 과공은 비례라 하던가. “왜 외국어를 잘  못 가르치는가. 괴테는 열세 살 때 모국어 외에 세 개 언어를, 그것도 말과 글을 다 습득했다. 괴테가 똑똑했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그의 능력을 키워준 tm승도 있었던 게 분명하다.(26p)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고 추측성 비판에 불과하다.

 

 


저자의 서고 방식이 얼마나 편향적인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정말 어이 없다. 부정하려들면 부정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 교사들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많이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왜 교사들만 돈을 받고 학생들은 안 받는지, 그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26p)

 

 

 자기모순에 자승자박의 논리도 서슴지 않는다. “정말이지 옛날에는 더 간단하지 않았던가? 학교와 관계있는 것은 모조리 의무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떻게든 해야 했던 것이다.”(47p) 그렇게 시종일관 주장하던 각자의 개성존중이나 저마다 다른 방식의 교육은 어디로 갔는가?

 

 

 

저자의 이런 주장은 우리 교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본다. “학교는 우리의 일평생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집단 내에서의 실존적 경험의 실험장이기도 하다." (52p)  ”“교사들의 사이에서 정의감은 찾아볼 수 없고, 그들은 예측불허의 권력을 자랑한다." (55p) “가르치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명료하고 흥미진진한 설명,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지속적인 동기 부여, 강력한 보상, 그리고 감정을 배제하고 그 시간에만 국한한 처벌이 바로 그것이다.”(61p) “가정교육을 잘 받고 책임감이 있으며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열심인 아이들의 무리를 가르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교사가 달리 교사인가? 학습 의욕이 없고 반항적이고 무관심한 아이들에게도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행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가 아닌가?”(99p)

 

 


이 책 서문에서 한국의 교육을 칭찬하는 듯 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세계 각국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독일이 20위인데 한국이 핀란드와 1.2위를 다투니 한국의 학교는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15세 아이들을 기준으로 핀란드는 주 30시간의 성과인데, 한국은 50시간의 성과이므로 그다지 한국의 교육은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계발에 제동을 걸고 자살하는 학생이 속출하니 꽝이고, 핀란드의 예는 학생과 교사의 상호존중, 정중하고 인간적인 친교, 낙오자 없는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아주 훌륭한 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단순 비교가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저자는 모른단 말인가

 

 


“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믿게 하고 외모와 성격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창피를 준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기까지 하면서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학생의 체면을 손상시티는 수만은 행동들이 과거의 회초리와 징계 조치들을 대체하고 있다. 무시하는 시선과 바보 같은 농담은 과거 학생들을 길들이는 수단이었던 꿀밤 먹이기나 회초리질보다 고통이 덜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당하고 만성적으로 악의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훨씬 큰 상처를 준다“ (170p)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런 교사는 없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이 저자의 순수한 입장을 대변한다면,  저자는 지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아이를 기르고 직업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저자는 피해망상증 환자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든다.  글의 내용 중 자기 자식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를 수십 번도 반복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담임이 원하는 대로 한다. 담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했다가는 자식에게 바로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72p)

 

 

 

 

끝내는 저자가 한 교사를 날려버리려 시도한다. 교육청에 투서를 한 것이다. “그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대신 교육청에서 서류를 분류하고 도장 찍는 일을 시키자는 나의 제안을 장학관은”(197p) 한 마디로 저자는 좋아하는 선생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선생을 영화관에서나 만난다.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귀를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교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있다”(233p)

 

저자는 학교 때부터 반골이었다. 라틴어 시간이 싫어서 무조건 사유 조퇴하다가 샘이 면제해 주어서 혼자 책 읽고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샘이다라고 처음으로 좋은 선생을 등장시킨다.(230p) 너무 자기중심적이 아닌가.

 


몇 가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더라고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동의할 수 없다. 출판사 측에서 교사에 대한 더 자극적인 비판을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익명으로 책을 출판했다가 나중에 저자가 밝혀지는 것도 하나의 출판 마케팅이라는 냄새가 난다. 저자를 만족하는 교사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이 자기 자식을 가르친다고 해도 본인의 조건에 맞게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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