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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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서 소개된 책이라 읽게 되었다.  유시민은 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번에 해당하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이 책을 선정했을까.  절판 본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영웅, 노통을 염두(念頭)에 두었을 것이다.

 

 


이 책은 언론의 폭력 문제를 다루었다.  아주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 관리사의 인생을 조폭 언론이 어떻게 망쳐놓는가를 건조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즉 성실하게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은 뜻하지 않는 조폭 언론이 들이대는 비수에 처참히 짓밟힌다는 내용이다. 그녀가 종국(終局)에는 그 기자를 총으로 쏴 죽여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것은, 이 책을 읽은 보답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큰 기쁨이지만, 대체로 답답하고 우울함을 감출 수 없다.

 

 


이 책은 1975년에 발표 되었는데, 이 글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온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으면 환호하며,  달리하면 침소봉대하고 왜곡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신문이, 분명히 현재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안다. 

 


우리나라의 <차이퉁>에 해당하는 신문들은 극우적인 사고와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조롱한다. 최근, 법원 판결이 지들 마음에 안든다고  가차 없이 담당 판사 사진 등을 공개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식이 올바로 박혔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의 무모한 작태를.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이 설정한 아젠다에 말려들어 가서 끝내는 제 발등을 제가 찍는 자승자박을 초래하기 쉽다.

 

 

 

 특히나 현 정권에 들어서는 마치 보수 언론이 정치를 하는 것으로 착각할 경우가 종종 있다. 오히려 검찰이나 정치권이  우리나라 <차이퉁>지에 해당하는 신문에 잘 보이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하면 너무 거친 표현인가. 하여튼 보수 신문, 그들은 막강하다. 세계적으로 종이 신문이 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그들에게 조금만한 불평이라도 하면, 지면을 키우고, 줄이며, 며칠 보도하여 당사자를 초토화 시키고 무장해제 한다. 

 

 

 

어떤 신문 사주 놈이, 전두환 때 자기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했다고 하던데, 나는 ‘밤낮의 제왕’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 독재 정권의 비호아래 급성장한 우리의 <차이퉁>이 오늘도 열심히 왜곡하는 현실을 아는 사람은 가슴 아파 한다. 철부지 어버이 연대만 빼놓고 말이다.

 

 

무고한 카타리나가 거대 신문에 의해서 당할 때의 상황은 우리와 아주 똑 같다. 그녀가 수사팀에게 끌려가 신문을 당하는데, 여기서도 ‘빨대’가 등장한다.  마치 노통이 당할 때 검찰에 보수 신문에 잘보이려는 ‘빨대’가 있었듯이 말이다. 그들은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언론의 사명을 빙자하여 힘없고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을 짓밝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성공하며, 입신양명하여 자손 대대로 부를 누리는 자들이다.   

 

 

카타리나가 근검절약하고 대출을 받아서 산 아파트가 소설 속에서  이슈로 떠오른다.  조폭 언론에 의해서, 빨갱이가, 가정부인데, 어떻게 저런 좋은 아파트를 소유했는가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거기에 <차이퉁>의 기자가 있다. 결국에는 시원스럽게 총 맞아 죽지마는, 그는 이렇게 왜곡하고 자기 마음대로 윤색한다.

 

 


‘그녀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다’는 지인들의 인터뷰를‘그녀는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 로 슬쩍 바꾸어 버린다.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로 (107P)로 교묘히 말은 바꾸어 보도하여 그들의 먹이 감을 단숨에 비호감으로 만들어 버린다. 

 

 

 

 

 

언론의 자유는 어디까지 인가. 언론의 역할을 무엇인가. 이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참으로 고상한 물음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이다. 코드가 맞는 정권에 따라서.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자기와 코드가 맞는 권력은 비호하고 용비어천가를 매일 부루며 찬양한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소설 속의  <차이퉁>은 어느 신문이 해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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