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씨가 젊어서 기자 노릇하던 시절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답니다."저 친구 누구야?" "아...모르나? 저 친구 아버지가 작가 김광주 씨야." "오...그렇군.그러고 보니 닮았네..." 하지만 이젠 김광주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지금, 김광주는 김훈의 아버지로만 알려지고 있습니다.세월이 흐르면서 김광주 작품을 읽는 사람이 줄어든 탓이지요.
김광주(1910~1973)는 30~40년대에 중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그 뒤 일생을 통해 중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국내에 소개했지요.무협소설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김광주가 60년대에 이름을 떨친 <정협지>라는 소설을 알 것입니다.이 소설은 원래 대만 소설인데 김광주가 번안했습니다. 워낙 실감나게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서 원작보다 더 재밌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무협소설 애호가라면 필독서지요.
내가 김광주의 작품 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도설 중국의 역사>(전8권)입니다.이 책은 원작이 중국의 증선지가 쓴 <18사략>입니다.요순 시대부터 시작해서 명나라가 만주족에 망할 때까지의 이야기인데 김광주가 번역한 것은 아니고 쉽게 풀어쓴 책입니다.상당한 분량이지만 문장이 유려해서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그 뒤의 청나라와 중국 혁명에 대해서는 진순신 책으로 보충했지요.
요즘은 삼국지 하면 이문열 삼국지가 유명합니다만 한때는 김광주 삼국지도 꽤 잘 나갔습니다.지금도 헌책방엔 단권 짜리의 두툼한 김광주 삼국지를 가끔 볼 수 있지요.이맇듯 대륙적이고 장대한 작품을 쓴 김광주지만 단편은 섬세하고 잔잔한 편입니다.어떤 평론가는 사소설 같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나는 그 중에서도 '양자강 연안'이라는 단편을 좋아합니다. 배경은 양자강에서 어부로 사는 조선노인 이야기입니다.중국에 살던 조선사람들이 해방이 되자 조선에 가서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사기치는 것이 꼴보기 싫어 그냥 양자강에 눌러산 독립운동가 이야기입니다.아편장수, 매춘업자까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면서 해방정국을 어지럽히는 인사들이 있었다는 우리네 어두운 역사...막판에 대반전이 숨어 있는데 여기서 밝히면 재미없으니 직접 읽어보세요.
중국혁명사 관련서적을 일단 마치고 한국전쟁 관련서적을 읽다가...좀 지루해서 단편소설을 읽는 중에 다시 김광주 단편선을 꺼내들었습니다.꽤 오래전에 읽어본 작품이지만 오랜만에 읽으니 좋네요.나는 독서가 잘 안 될 때엔 외국 것이든 국내 것이든 단편소설을 읽는 버릇이 있습니다.김광주 작품을 읽다 보니 아들인 김훈의 회고담이 떠오릅니다.
김광주는 무협소설로 상당한 인기를 모은 작가인데도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 김훈의 회고입니다.당시 저작권 개념이 희박해서 작가에게 불리한 계약제도 때문이었지요.게다가 김광주가 술을 좋아해서 환자가 되어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것이 더 건강을 해쳤습니다.이런 회고담을 들으면 참 안타깝습니다.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시절 작가는 물론 음악계의 작사작곡가들도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그러고 보면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요.
김훈의 문장에 대해서는 평가가 많이 엇갈리는 편입니다.어떤 이는 <칼의 노래>에 나오는 문장은 이상하다고 감상평을 적은 이도 있더군요.나는 그런 문장도 괜찮다고 봅니다.김훈 표 문장이지요.하지만 나는 김광주의 문장이 더 맘에 듭니다.김훈보다 김광주를 먼저 읽었기 때문일까요...지금도 그의 단편선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김광주 단편은 요즘은 서점에서는 물론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