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에는 주로 국내외의 중단편을 읽습니다.왕성한 호기심 때문인지 단지 내용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나오는 지명,역사적 인물,사건까지 샅샅이 알아보는 편입니다.많은 이들이 외국 소설을 읽다가 지명이나 인명, 사건 등이 생소해서 걸치적거린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나의 이런 취미는 상당히 특이합니다.
한 번 읽은 작품을 읽고 또 읽고 하는 것도 까닭이 있습니다.전에는 머릿속에 안 들어오던 내용이 들어오기도 하거니와 새로 생긴 관심 때문에 작품 속의 고유명사를 다시 알아볼 기회도 되니까요.며칠 전엔 애독하던 추리단편인 안소니 버클리 씀 유종혁 번역'우연의 심판'(하서출판사1980)과 허버트 조지 웰즈 씀 이가형 번역'타조경매'(금성출판사 1987)를 연이어 읽었습니다.읽다 보니 우연히 두 작품에 동일한 도시가 나옵니다.영국의 도시 사잠프턴입니다.그런데 이렇게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니 영어로는 어떤 철자로 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다행히 '타조경매'엔 친절히 역주가 표시되어 있습니다.런던 동남쪽에 있다고...
자...늘 머리맡에 비치해둔 지도책을 꺼냈습니다.우선 고교 사회과 부도. 안 나와있네요.타임에서 나온 월드 아틀라스. 여기에도 없고...그러다가 아하! 무릎을 쳤습니다.이거 일본어판 중역하면서 가타카나 표기를 그대로 땄구나! 그렇다면! 그렇습니다.가타카나에서는 THA를 우리발음으로는'자'로 표기합니다.그러므로 사잠프턴은 Southampton입니다.당연히 이 도시는 지리부도에 나와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교육받은 이들이 쓰거나 번역한 책에는 이렇게 일본 가타카나 발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경우가 많습니다.나도 예전 세로줄로 된 책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만 지명이나 인명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이젠 거의 100% 가타카나 표기를 알아듣습니다.하지만 일본어를 모르던 시절엔 그냥 넘어갔죠.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비롯한 서양어를 발음하거나 표기할 때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발음이나 표기 역시 못알아 듣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금성출판사 책의 역자인 이가형 씨는 영문학자로 많은 책을 번역했습니다.그런데 영문학자 역시 이런 어이없는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물론 그가 교수이기 때문에 자기 제자들을 시켜서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잠프턴 같은 표기는 최종감수를 스스로 하여 설령 제자들이 실수했더라도 고쳐주어야죠.이 번역본은 원래 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 100권이 1982년에 나왔을 때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은 1987년 100권 중 일부를 빼서 60권으로 한 것이고 세로줄을 가로줄로 한 것입니다(문고본으로 나온 선샤인 시리즈).그런데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니 예전의 표기를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헌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나라가 일본문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음을 실감합니다.이가형 씨 예를 들었지만 영어를 전공한 교수의 번역도 일본어 중역본에 기댄 것이 많습니다.물론 소설 속의 작중인물을 제외한 고유명사는 일일이 확인해볼 사람들이 적겠지요.하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지식도 넓어지고 또 가타카나 표기법까지 자세히 알게되니 나름대로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이제는 가타카나 표기 정도는 웃으면서 너그럽게 봐줄 정도가 되었죠.
헌책을 볼 때의 장애물로 세로줄과 국한문 혼용을 꼽습니다만 더 깊이 들어가면 가타카나 표기 역시 상당한 장애물입니다.하지만 좀더 여유있는 맘을 가지고 가타카나 표기도 공부한다는 자세로 접근하면 또다른 재미도 느낄 수 있으니 마음먹기 나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