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점에서 정운영 씨 책 찾기가 쉽지 않지만 생전에 그의 칼럼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특히  시사평론 외에 서평 읽는 재미를 주던 저술가지요.그의 본업은 경제학자였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정운영은 명칼럼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음 글은 1990년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에 사죄를'에서 일부 인용한 것입니다.이 글 전체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대한 서평인데 글의 초입에 일본 대하소설을 호평한 내용이 나옵니다. 

   ----<삼국지>나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으면서 소년기를 보낸 우리들은 즉시 <임진왜란>이나 <대원군>이나 <상록수> 따위로 왕성한 문학적 욕구를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런데 부패한 왕조에의 충성이라든가 감상적 나로드니즘으로 포장된 애국이란 주제에도 물론 식상했지만, 고식적 문체나 천편일률의 따분한 구성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익숙한 독자들의 구미를 잃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한때 유주현의 시대소설이 인기를 모았던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허점들을 부분적으로나마 극복한 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이른바 대하소설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나 역시 요시카와 에이지나  시바 료타로나 야마오카 소하치 등의 작품에 아주 탐닉했습니다.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벌레로 하여금 갉아먹도록 만든 다음 그것을 모함의 도구로 내미는 줄거리보다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명분 아래 막부와 천황 세력이 칼싸움을 벌이는 내용이 훨씬 더 재미있었고,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는 처사보다는 할복이란 잔혹한 풍속이 차라리 더 신기했었습니다.물론 그 소설들이 내세우는 대의라는 것이 결국은 봉건 윤리의 울타리를 지키는 시대착오나 군국주의로 치닫는 비극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만, 여기서 내가 주목하려는 바는 오히려 그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쏟은 작가의 투철한 장인정신이었습니다. 

 ----예컨대 <대망>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필에는 18년이란 세월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내 욕심을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진정 끊임없이 버티는 작품을 생산해내고, 그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물론 길게 쓰고  많이 읽혀야만 문학으로서 성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나 반대로 민족의 문학으로서 당대에 서슴없이 내세우고 후세에 유감없이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런 각고의 노력과 집념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운영의 이 글은 나중에 <경제학을 위한 변명>(까치 1991)에 다시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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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5-1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다가 삼국사기를 읽으니 애들 소꼽장난하는것 같았어요. 그 원인에 왕조에의 충성, 포장된 애국주의, 고식적 문체, 천편일률의 구성 등등 갖다 붙일 이유가 정말 많네요. 우리역사를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말이에요.

노이에자이트 2011-05-12 01:07   좋아요 0 | URL
그런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가 봐요.그런 평가에 대해 애국심이 부족하다, 민족주체성이 없다고 발끈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버벌 2011-05-12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태백산맥에 대해선 어떻게 서평을 하셨나요? ^^ 그 부분이 읽고 싶어요.


나뭇잎과 뒤주의 한국사가 저에겐 "참" 재미있는 역사입니다. 애국심. 민족주체성이 강한가봐요. 아직 다른 것을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접했다 해도 시선이 바뀔지는 의문입니다. "역사"를 이제야 시작했고, 일본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읽은 것이 없어요. 읽고나서 어떻게 될까요? ^^

노이에자이트 2011-05-12 19:56   좋아요 0 | URL
민족문학 최대의 업적이라고 했습니다.

민족주체성을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우리역사에서 당쟁을 부각시키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영광스럽지 못하고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지요.당연히 나뭇잎...뒤주...등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죠.버벌 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야단을 맞지 않을까 염려가 드는...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왕조의 음모를 다루는 장르는 인기있는 역사소설의 소재인 것도 사실입니다.궁중암투를 백안시할 필요가 없는 거죠.정운영 씨는 그런 소재를 다루는 우리나라 작가의 역량에 아쉬움을 느낀 것 같습니다.

뭐든지 상당한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으면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일본 시대소설도 마찬가지죠.우선 얇은 것부터 읽으심이...

루쉰P 2011-05-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대하소설과 일본 대하소설의 차이는 정운영씨가 말한 것처럼 치밀한 것이겠죠. 사실 뒤주나 벌레나 그 음모 구성이 얕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느끼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 민족문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닌데 일본 대하소설에서는 어떤 단선적인 인간이 아닌 그러니까 음... 우리 대하소설의 인간은 흑 아니면 백 같은 단순한 인간에 대한 파악인데 비해 일본 대하소설에서는 인간의 파악이 흑과 백 그리고 적 등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파악이 돼서 역사와 그것을 만들어 내는 '인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고 할까여? 암튼 전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일본 대하소설을 높게 봐요.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도 일본 대하소설과 같은 느낌을 줘요. 그래서 좋아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1-05-13 17:47   좋아요 0 | URL
구성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편 추리물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에 뒤지는 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현대 단편이나 중편은 우리나라도 좋은 게 많아요.구미지역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죠.

대하소설은 끈기가 있어야 읽을 수 있죠.태백산맥은 중반까진 괜찮은데 마지막에 갈수록 이야기의 긴장이 풀려버리는 느낌이 있어놔서...특히 전쟁 끝날 무렵 북에서 내려온 지령 이후 남한 빨치산들 이야기는 좀...거시기...

루쉰P 2011-05-13 17:19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중,단편도 그렇고 사실 거의 안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 해요. 전 왜그리 우리나라 역사 소설은 안 읽는지 모르겠어요. 워낙 중,고 시절부터 재미없는 역사 수업의 세뇌 때문인지 식상하고 재미없다는 느낌부터 받으니 말이에요. 이런 것도 좀 시정해야 할 부분이에요. ^^

전 뒤로 갈 수록 쓸쓸해 지더라구요. 태백산맥이 ^^

노이에자이트 2011-05-13 17:48   좋아요 0 | URL
60~70년대 중단편에 의외로 괜찮은 게 많아요. 한번 읽어보세요.기법도 신선하고...

아이고 따분한 역사교과서...지긋지긋합니다.

박헌영 노선과 김일성 노선 사이에서 균형잡기가 쉽지 않았겠죠.

릴케 현상 2011-05-1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궁정전투의 국제화라는 책을 좀 뒤적였는데, 이런 것도 현대의 대하소설처럼 읽히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5-13 17:10   좋아요 0 | URL
하하하...파워엘리트 이야기는 늘 흥미롭잖아요...

비로그인 2011-05-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명칼럼니스트였죠. 논리와 개성이 공존하는, 칼럼다운 칼럼을 쓰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13 20:45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 칼럼들을 재밌게 읽으신 모양입니다.

푸른바다 2011-05-1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이지만 <경제학을 위한 변명>을 꽤 탐독했었는데 위 구절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군요.^^ 아직 책을 갖고 있으니 찾아봐야 겠습니다. 저도 한때 정운영 선생의 글을 꽤 좋아했었으나 어느 때 부터인지 식상해져서 잘 읽지 않았었죠. 그러던 와중에 중앙으로 가시고. 말년의 글들은 정말 아니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5-15 21:46   좋아요 0 | URL
예.중앙일보 논설위원 된 것 가지고 굉장히 논란이 많았죠.그땐 교수도 되고 해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왜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수락했는지 좀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