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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평점 :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가지각색의 복합적인 기억의 편린이 모여 인생이 된다. 하지만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그곳에 대한 단상은 정리해두면서도, 끊임없이 일상이 이어지는 공간에 대해서는 변화의 흐름에 맡겨두고 기억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한 도시라는 공간을 부정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그 도시에서 성장한 저자들의 자전적 에세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을 통해 그 도시의 과거가 살아나고 현재로 이어지는 삶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책은《베이징, 내 유년의 빛》으로 중국의 대표 시인 베이다오의 자전적 에세이다. 그는 중국 신시기 '몽롱시'의 대표 시인으로, 깊이 있는 자아의식과 철학, 상징과 암시, 냉엄하고 심오한 필치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1992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유년을 18개의 에피소드로 반추한다. 1949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점철된 유년기를 보냈는데, 이 책을 통해 그 고된 기억의 문을 연다.

저자는 베이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고 한다. 특히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 도시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고. 13년 동안 떠나 있던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긴 했지만 베이징의 모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고 한다. 완전히 낯선 도시,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 셈이다. 머리말을 읽으면서 나의 고향, 서울을 떠올린다.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그곳을 떠난지 이제 7년이 되었고, 이달 말에 잠깐 들르려는 그곳은 이미 나에게 낯선 공간이 되어있을 것이다. '자신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 셈이었다'는 표현이 내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온다.
그는 그 순간부터 이 책을 써야겠다는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글로써 이 도시, 베이징을 재건하고 싶었다고. 이 책은 베이다오 시인의 베이징 재건 과정이며, 경건한 의식이다. 유년 시절의 기억부터 글이라는 매개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과거와 현재의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기억은 선택적이고 모호하고 배타적이다. 게다가 장기적인 동면 상태에 빠져 있다. 글쓰기란 이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다. 기억의 미궁에서는 하나의 길이 또 다른 길을 인도하고, 하나의 문이 또 다른 문으로 열려 연결된다. (10쪽_나의 베이징, 머리말 中)
이 책에는 베이다오가 들려주는 18개의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빛과 그림자, 냄새, 소리, 장난감과 놀이, 가구, 레코드판, 낚시, 수영, 토끼 키우기, 싼불라오 후퉁 1호, 첸씨 아줌마, 독서, 상하이에 가다, 초등학교, 베이징 제13중학, 베이징 제4중학, 대관련, 아버지 등의 글을 볼 수 있다. 글은 베이다오의 유년 시절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들려주며 진행된다. 글을 보며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부모 세대의 삶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베이징으로 돌아오며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저자의 글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많이 묻어나 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또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되며 삶은 이어진다. 가부장적이고 단호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신장암과 B형 간염으로 병상에 누우신 모습까지, 읽어나가다보면 다른 모습이지만 묘하게 겹쳐지는 인간사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봄에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베이하이공원에 놀러 갔던 일이 기억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방이 짙은 황혼에 젖어 있었고 얼음이 녹는 한기가 느껴졌다.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공원 후문에서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걸음을 늦추고는 사방의 유람객들을 둘러보고 나서 내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백 년 후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우리를 포함해서 말이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안경 테두리가 번쩍였다. 그 속에 한 가닥 냉소가 감춰져 있었다. (328쪽)
《상하이, 여자의 향기》가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감성을 돋우는 글이라면, 이 책《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남성 작가가 유년의 기억을 살려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 시절 세상의 이야기이다. 책표지의 색깔이 전체적인 내용과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권의 책을 연이어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한다. 두 가지 방식으로 베이징과 상하이를 바라보고, 자신의 기억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