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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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추적하지 않는다

뒷표지에 있는 이 한 문장이 주는 여운은 꽤나 오래 간다. 여기에서부터였을까. 분홍빛 표지가 주는 아련함과 내가 살던 공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복잡한 심정이 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복합적인 감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책《상하이, 여자의 향기》를 향한 마음은 온갖 감성을 자극한다.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면

빛은 반딧불처럼 유유히 들어와

편안하고 포근한 잠의 고향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 그림 같은 도시에서 귀를 쫑긋 세우면

아주 진하고 달콤하게

코 고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_왕안이 (책뒷표지 中)

 

 

이 책은 중국 작가 왕안이의 자전적 에세이다. 왕안이는 오늘의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상하이작가협회 주석으로, 중국의 중요한 문학상을 두루 섭렵했다. 상하이 대표 여류작가 왕안이(王安憶)는 이 책《상하이, 여자의 향기》(원제-남자와 여자, 여자와 도시)에서 상하이의 일상에 대한 기억과 사람, 도시, 삶으로 이어지는 감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저자의 글이 내 마음을 톡 건드려준다. 천천히 읊조리며 읽다보면 마음속 그림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며 감성이 살아난다. 일상이 아닌 곳으로 가야만 비로소 작은 일들도 기억에 담았던 나와 대비되는 모습이기에 일상을 보는 시선을 얻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간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우는 듯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흘러가버리는 무언가를 붙잡아 기억에 새기는 일이다. 왕안이의 글은 상하이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은 물론, 내가 살던 공간까지 되살리는 마법을 펼친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상하이를 찾아서, 상하이와 베이징, 바다 위의 번화함, 거리 풍경, 상하이 서양식 주택, 타이캉로, 주인의 하늘, 석양, 가로등 아래, 집 안과 집 밖, 과거의 생활, 피곤한 도시인, 상하이는 코미디다, 상하이와 소설, 상하이 음식, 성황묘의 구경거리와 주전부리, 도처의 농민공들, 창강의 지류에서, 영원히 용속해지지 말자, 더 행복한 삶을 위하여 등의 글을 볼 수 있다. 2부에는 남자와 여자, 여자의 도시, 여성의 얼굴, 여성 작가의 자아, 물질의 세계, 상하이의 여성, 생사와 이별,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옥구슬로 보답했지요, 우울한 봄, 공간은 시간 속을 흐른다, 천사창 아래서 등의 글이 담겨있다. 일러두기에 보면 저자와 협의하여 원작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고 밝힌다. 원작의 제2부 9장과 10장은 이 책에서 제2부 6장과 7장으로 옮겼고, 이 책의 제2부 8,9,10장은 저자의 다른 에세이《공간은 시간 속을 흐른다》(2012)에서 발췌한 글로 대체했다고 한다.

 

전에 어느 소설 첫머리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더듬어보지 않는다."

사실 더듬어본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살고 있는 곳은 현실과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성격이 일상생활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도시는 너무나 진실하다. 그래서 이론적인 개념들은 전부 허무한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나로서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상하이를 묘사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모든 것의 일상이 개인의 복잡다단한 생활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은밀하고 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1쪽)

이 책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첫 문장이 매력적으로 다가와야 뒷부분을 읽어나갈 추동력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충분히 계속 읽어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 문장에서 충분히 공감하게 되고, 그녀가 들려주는 상하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마음의 자세가 갖춰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 주전부리, 날씨와 냄새, 계절 변화, 장쑤로 거리 풍경, 상하이 음식 등 세밀하게 들려주는 그녀의 공간을 짐작하며 읽어나간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일까. 저자의 감성에 도움을 받아 다른 듯 비슷한 교집합을 찾아가며 나만의 시간 여행도 함께 할 수 있는 책이다.

사실 거리의 풍경은 드러난 삶의 결심이자 활짝 열린 얼굴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되다 보면 한 겹 단단한 허물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를 굳은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거리 풍경은 더 거칠고 지저분해지는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리 풍경일수록 더 거칠고 약간의 폭력마저 동반하여 흉흉한 기질을 드러낸다. 그 등불 화려한 거리 풍경 아래서 장수로가 부드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천하고 억울한 모습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너그럽고 깊이가 있는 모습이다. 보기에는 아주 가난하고 초라한 것 같지만 대걸레로 쓰는 천조차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점포가 있다. 이 거리는 침착함과 인내심이 있어 여기저기가 조금씩 변해가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말로는 거리 풍경이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풍경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곳의 거리 풍경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일관적인 삶의 계획을 갖고 있다. (53쪽_거리 풍경 中)

 

옮긴이의 글을 보면 2013년 인천문화재단이 주최하는 AALA 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왕안이는, 자유공원에 만개한 봄꽃들이 자신이 떠날 때까지 지지 않고 남아주어 고맙다는 폐막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 감성을 갖고 있고, 폐막인사를 통해 언급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 말 하나만으로도 왕안이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상승했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그녀는 상하이 토박이답게 깊은 역사인식과 오랜 상하이살이의 체험을 바탕으로 다른 상하이 예찬론자들이 보지 못하는 과거와 현재의 지속태로서의 상하이, 가늘고 섬세한 만큼 깊이 있고 정확한 디테일로서의 상하이를 읽어내고 잇다. 이 책에 담긴 30편의 글은 그녀가 매일 만나는 상하이의 섬세한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안 어딘가에 거칠면서도 여리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절제할 줄 아는 상하이의 진정한 기질과 정신이 서려 있을 것이다. (269쪽_옮긴이의 글 中)

 

누군가가 짚어주어야 비로소 깨닫는 건조한 일상에 감성 코드를 끌어올려주는 책이다. 상하이라는 도시를 떠올릴 때에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사람과 삶까지 함께 인식한다. 아울러 서울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는 것, 독자에게도 무언가 떠올리며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을 붙잡도록 끌어주는 것도 독서의 연장선이다. 저자가 주는 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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