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
전수민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평점 :
물의 도시 베니스에 여행으로 간 적이 있다. 길게 잡아서 4박 5일의 시간이었는데, 더 오랜 시간 있어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광에 질리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곳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아무데나 자리잡고 앉아서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이고, 생각나는대로 끄적이며 펜을 잡고 있는 것도 좋으리라 상상해본다. 그런데 베니스에서 한 달 동안 입주 작가로 지낸 시간은 어떨까, 그곳에서 어떤 작품을 하며 보낼 것인가? 이 책《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보며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를 엿본다.

이 책의 저자는 전수민. 전통 한지와 우리 재료를 이용해 우리 정서를 표현하는 화가이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초대전을 포함해 1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열었고, 일본과 프랑스의 단체전과 각종 아트 페어에도 참여했으며, 독특한 한국화 작품 활동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은 화가 전수민이 베니스 스튜디오에 입주 허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한 달 동안 베니스에 머물면서 창작한 작품을 제출하고 예술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롤로그가 'D에게 보내는 편지, 어쩌면 유서'라고 시작된다. 출국 전의 긴장감이 상상된다. 본인은 심각한데, 보는 사람은 웃기고 어이없고 귀엽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예민하니까 예술가인가보다. 새로운 환경 앞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을 들여다보며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인 여행기에 그칠지도 모를 내용을 그녀의 작품 세계가 뒤덮어 자신만의 개성을 도드라지게 표출해낸다. 한지를 이용하는 화가의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사실은 그 이야기가 더 시선을 끌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안에서 보물찾기를 하듯이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화가로서 베니스에 한 달 머물렀던 시간이, 그것도 전통 한지를 사용해서 작품을 하는 화가의 한 달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종이는 천 년 이상 보존이 되는 우리 종이만의 힘이 있어요. 1200년 전 우리 그림도 아직 바스러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지! (31쪽)
내 작업에 주로 사용하는 한지에는 미세한 숨구멍이 있어요. 두터운 색칠로 그 위를 덮어버리는 대신, 천천히 색을 쌓아올리는 건 그래서예요. 올리고 말리기를 반복한 그 색들을 한지는 고스란히 받아들이거든요. (64쪽)
작품의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베니스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과 작품이 나오는 과정, 작업실 공간 등 종합적으로 보게 된다. 결과물뿐만 아니라 작품이 나오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좀더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도 어쩌면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긴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걸음 다가와주기를 바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한 그림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보면
난 그 사람을 오래오래 지켜보게 돼요.
그 사람은 얼마나 오래오래 집중해서 보는지
내가 보고 있다는 낌새도 알아채지 못하지요. (192쪽)


내 작업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것들이 작품에 영향을 끼칩니다. 생각이란 것은 하다 보면 도중에 어떤 돌발 이유로 끊기거나 왜곡될 수도 있고, 이미 잘못된 기억을 붙들고 반드시 그러할 거라고 믿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기억'이란 것을 이해하는 것부터가 작업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66쪽)
자신의 기억을 이해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작업의 시작이라는 말에서 생각에 잠긴다. 그 또한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며, 이 책을 통해 베니스 생활을 짐작해본다. 어딘가, 여기가 아닌 곳에서, 그동안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본다면? 내가 본 그곳을 한국 화가 전수민은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화가의 베니스 한 달 시간을 엿보며 그 생각을 따라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