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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어떤 직업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생계 수단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쓰기에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대리운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랑스럽게 대리운전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는 힘들고, 어떻게든 다른 방도가 생기면 그만두고 싶은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며 '지방시'를 이야기한 저자가 이번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우리 사회의 모습을 스스로 사유한 결과로 이 책《대리사회》를 펴냈다.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한숨과 함께 종종 "할 거 없으면 그거나 해야지" 하는 자조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거나'를 대신할 단어들이 몇 있지만 대리운전은 자주 그 자리를 도맡는다. 그런데 그 대리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 주변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하나의 개념어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화자가 주체성을 포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1쪽)
이 책의 저자는 김민섭.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펴낸 이후, 2015년 12월에 대학에서 나왔다. 그 이전까지 대학,대학원을 떠나본 일이 없는 현대소설 연구자였다. 글이라고는 논문만 읽고 썼고 4년 동안은 글쓰기 교양 과목을 강의했다. 하지만 대학 바깥에 더욱 큰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음을 알았고,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는 '김민섭'이라는 본명으로 논문이 아닌 글을 쓴다.
저자는 대학에서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느 중간에 위치한 '경계인'이었다. 강의하고 연구하는 동안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되지 않았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도 아니었다.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으로 8년 동안 존재했다. 그러한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에게 보이는 어느 균열이 있다. 그는 경계인으로서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그 균열의 너머와 마주한다. 그렇게 작가이자 경계인으로서 계속 공부하고 노동하며, 글을 쓰고 싶어한다. (책날개 中)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통제되는 감각들', 2부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들', 3부 '주체가 될 수 없는 대리노동들'로 나뉜다. 저자가 직접 경험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몰입도가 뛰어나다. 대학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맥도날드에서 1년 3개월 근무하며 일어난 변화, 대리운전을 하며 사회 곳곳의 모습이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등 주체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7쪽)
책을 읽다보면 웃픈 현실을 보게 된다. 웃기는 장면도 군데군데 잘 넣어놓았는데, 웃기지만은 않은 씁쓸함이 있다. "저도, 대리기사입니다"라는 일화가 있는데, 아내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웃겨 죽겠다며 말을 못 잇고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저자도 같이 웃다가, 눈물이 났다고. '우리는 그 새벽에 함께 웃으면서 울었다.'는 글이 이상하게도 송곳처럼 후벼파는 묘한 기분이었다. 어찌보면 웃긴 일도 아련한 아픔을 남기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왠지 짠한 느낌이다.
단순히 대리운전 경험담 만이 담겨있다면 이 책을 읽는 깊이가 덜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대리운전을 하며 느낀 감정과 거기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함께 어우러져서 깊은 맛을 우러낸다. 힘겨운 현실을 담았지만 무겁지만은 않고, 웃음 코드를 곳곳에 심어놓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적당한 무게감을 주는 글이다.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와 고독,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라는 비아냥과 냉소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하지만 대리사회의 괴물은 여전히 개인들이 그 분노를 온전히 발산할 수 없게 만든다. 대신 대리만족의 기제를 계속 내보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취되고 나면 개인의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 그 괴물에게 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개인이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더욱 자극적인 마취/환각제를 원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강한 쾌락의 기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아주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213쪽)
지방대학 시간강사가 대리기사가 되었다. 대학의 '유령'이 밤거리를 달리는 '몸'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 옆에 주인 자리에 앉는 몸은 행위가 통제되고 말이 통제되며 사유가 통제된다. 핸들과 액셀과 브레이크를 작동하는 손과 발이 남아 있지만 그조차 내비게이션의 규율 아래 있다. 그리하여《대리사회》는 정확히 은유한다. 우리 모두 스스로 주체라고 믿지만 실은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추천의 말_홍세화《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저자)
'대리운전'을 하면서 '대리사회', '대리인간'으로 생각이 뻗어나간다. 선입견이 깨지는 듯, 마음 속에 쌓아놓은 담을 깨어본다. 사회적인 현상, 그것이 직업이든 무엇이든간에 단순히 한 단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의 영역을 확장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 파악을 하게 되는 책이기에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