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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안에 담은 것들 - 걷다 떠오르다 새기다
이원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9월
평점 :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유난히 무서웠던 10월 태풍도 지나가고, 뒤늦게 내린 가을비도 이제야 그쳤다. 궂은 날씨에 산책을 꿈꿀 수 있었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이원 시인의『산책 안에 담은 것들』이다. 산책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걸으며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산책에 포함되는 것이다. 추천의 말을 쓴 이병률 시인에 의하면 이 책은 '한 시인의 산책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산책에 대해 사색해본다. 좋은 계절이 다 지나가버리기 전에 산책을 시작할 채비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원. 1992년『세계의 문학』으로 데뷔, 시인이 되었다. 시를 쓰고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문지문화원 사이 등에서 시창작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이번 생은 어린 시절 반복한 두 가지의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있다. 하나. 집 근처 돌산에 가서 색색의 돌가루를 칸칸의 곤충채집상자에 넣고 들여다보던 시간. 둘. 노을을 잡아보자 친구들에게 신호를 보내며 산 너머로 뛰어가던 장면. '이번 생'이라는 표현을 떠올릴 때 한쪽은 밀물 같고 한쪽은 썰물 같다. 한쪽에는 눈물, 한쪽에는 환희다.
이 책은 시인 이원의 첫 산문집이다. 공간과 시간 산책이며 마음과 생각 산책이기도 한 이 글들은 대부분『한국문학』에 2년간 연재했던 것이다. 그때로 부터 6년 정도 지났기에 최근에 쓴 몇 편도 들어 있고, 쓸 때와 다르게 바뀐 이름들, 없어지거나 변화된 공간들도 있다고 한다. 시간의 흔적이므로 그냥 두기로 했다고.
인간이라는 생물로 지상에 와서, 내내 매혹되어 있는 것이 '산책'이다. 내게 산책은 새벽을 향해 걷는다, 새벽을 대면한다와 같은 뜻. 산책은 나를 간명하게 만들어준다. 간명해진 몸으로 삶 속에 머물게 하며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준다. (9쪽_작가의 말 中)
이 책을 단순히 산책 예찬의 글이라고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기대 이상의 문장들을 만난다. 작가의 표현에 감탄한다.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하지?', 생각한다. 아마 시인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압축된 언어에서 뜻을 전달해주는데 독자의 경험과 상상으로 채워져서 의미는 더욱 풍성해진다. 오랜만에 이런 느낌이 좋다. 이런 책은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시간: 흐르는 것이라고 믿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것 사이.
공간: 채워지는 것과 비어 있는 것 사이. 또는 사라지는 허공과 나타나는 허공 사이.
사이는 언제 메워질까. 사이 안에 다 있다. 사이가 사라지면 시간도 공간도 욕망도 당신도 사라질 것이다. 사이가 사라지면 삶과 죽음이 바로 옆이었다는 것을. 모든 언어는 하나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이가 사라지면 멈춘다. 그 자리에서 썩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를 꿈이라고 희망이라고 삶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사이를 결핍이라고 환영이라고 부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19쪽_사이)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걸었던 길을 엿본다. 어쩌면 나도 산책을 하며 경험했을지도 모를 어느 순간을 작가의 표현으로 되살려본다.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살갑게, 산책하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산책하며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바라본다. 그런 경험이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느 그림 앞에 멈춰 섰던 순간, 가슴이 뛰었던 순간, 빛이 촤르르 내려오던 순간.
식목.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몸 안으로 이 말이 떠오른다. (230쪽)
앞으로 나만의 산책 역사를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좀더 관찰하고 마음 깊이 바라보다보면 그저 흘려지나갔던 것들도 되살아나 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좀더 많은 것들에 의미를 주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수많은 길을 걷고 그 길에서 교감한 어느 시인의 머릿속을 엿본다. 혼자만의 경험을 여러 독자에게 전해주는 뜻깊은 자리에 초대받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