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일까. 가을에는 시를 읽고 싶어서 시집 몇 권 주문했다. 살랑바람부는 나무그늘 밑에서 펼쳐들었는데, 난해하다. 나의 언어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좌절하게 된다. 나는 진정 시의 언어와는 별개의 사람인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는 시집 한 권 건져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함민복 시인의 시집을 건져내게 되었다.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음미할 수 있는 시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함민복 시인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이 나에게 위안과 시 감상의 시간을 전해준 책이다.

 

함민복 시인은 시집으로『우울씨의 일일』『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출간했고, 산문집『눈물은 왜 짠가』『미안한 마음』등이 있다. 오늘의젊은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 책 『말랑말랑한 힘』은 2005년 1월 초판 1쇄 발행 이후 2015년 8월 2판 6쇄 발행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공감한 시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보면 '시인의 말'부터 깔끔하다. 어쩌면 거기에서부터 이 책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

달밤

눈 밟는 소리는

내가 아닌

내 그림자가 내는 발자국 소리 같다

 

내 마음이 아닌

내 시의 마음이 활자로 돋아난 날

멀어

여기 짐을 덜어 놓는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을 때에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우울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시집은 다른 느낌이었다. 압축된 언어에 의미를 담아 한참을 곱씹으면서 읽으니 읽는 맛이 더해진다. 이런 것이 시집을 읽는 묘미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을날에 읽기에 좋은 시집이다.

 

긴 시와 짧은 시가 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시를 읽어나가는 속도가 정돈된다. 짧으면서도 의미를 담은 시는 오래 읽게 된다. 내가 찾던 시라는 생각이 든다. 깔끔한 느낌이 좋다. 그러면서도 시적인 언어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한다. 이래서 시를 읽게 되나보다.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식물은 살아온 몸뚱이가 가본 길이다' 같은 표현에 마음이 간다. 이 책의 제목 '말랑말랑한 힘'은 「감촉여행」이라는 시를 읽으며 공감하게 된다.

 

감촉여행

 

도시는 딱딱하다

점점 더 딱딱해진다

뜨거워진다

 

땅 아래서

딱딱한 것을 깨오고

뜨거운 것을 깨와

도시는 살아간다

 

딱딱한 것들을 부수고

더운 곳에 물을 대며

살아가던 농촌에도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

 

길이 길을 넘어가는 육교 바닥도

척척 접히는 계단 길 에스컬레이터도

아파트 난간도, 버스 손잡이도, 컴퓨터 자판도

빵을 찍는 포크처럼 딱딱하다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

딱딱하고 뜨거워지는 공기를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며 점점 굳어가는 도시의 감촉을 느껴본다. 점점더 딱딱해지고 굳어가는 도시의 모습을 시인은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다는 마지막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에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와 어울리는 계절인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좀더 시를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시집 중 하나가 이 책 『말랑말랑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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