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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표지에 보면 주의사항이 있다. '반드시 천천히 읽을 것' 주의사항을 그대로 따랐다. '의심하라, 생각하라, 비틀어라, 그리고 뛰어들라! 픽션이야말로 현실의 미궁에서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이 나에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얼핏 보면 얇은 책에 각각의 이야기도 짤막해서 금세 읽어버리고 말 것같은 책인데 나는 이 책을 자근자근 씹어먹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묘한 맛이 우러나는 책이다. 픽션이 현실의 미궁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듯, 이 책과 함께 한 시간들이 상상 이상의 세계를 제공해주며 현실 세계와는 다른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이 책의 저자는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1968년 스페인 마드리드 출생이다. 1994년 단편영화로 데뷔한 이후 스페인의 아카데미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야 상을 다섯 번이나 휩슬었고, 산세바스티안, 선댄스, 베를린, 발파라이소, 멕시코시티, 로스엔젤레스, 바야돌리드, 아바나 국제 영화제 등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여기 용이 있다』로 2015 만다라체 상을 수상했다.
때때로 사건들은 가능성의 테두리 밖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_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 책 제목에 나온 용들은 수 세기 전부터 고대의 미완성 지도들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들이 가리키는 세상이 끝나는 그곳에서 바로 지식이 생겨났다. 비축된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디에서 배를 돌려야 하는지, 또는 배를 침몰시킬 최악의 협곡이 숨겨진 깊은 바다가 어디인지 그 지도 위에 주의 표시를 해놓았다. '여기 용이 있다'라고...(중략)...이 책은 항해자들이 위험 표지판을 보고 뱃길을 돌렸던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경고와 한계를 무시하고 환상이라는 미개척 공간으로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 (7쪽)
저자는 이 책을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는 별개로 잠깐씩 짬을 내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쓴 이야기라고 한다.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처럼 예산과 촬영 계획, 기술팀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런지 그의 자유로운 글쓰기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앞부분의 몇 꼭지에 담긴 이야기만 보아도 그의 글에 매료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지, 인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그가 말한 이 책 읽는 방법을 철저하게 따르기로 결심했다.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 이야기 사이사이에 몇 초간 휴식을 취하기를 바란다. 또한 각각의 이야기들을 맛보기 전에 입속에 들어 있던 좋거나 나쁜 맛을 다 헹궈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는 잠깐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것이 힘들다면 앞에 있는 건물 벽이라도 바라보기 바란다. 또한,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읽다보면 처음에는 이야기들의 미로 속에서 정해진 길이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입구와 출구가 있다. 그 속에서 단계적인 진행이 있고, 순서에 따른 의도도 있으며, 일부 시적인 요소도 있다. 잘못된 우회로와 놀라움, 반전, 휴게소 등도 있다. 항해용 안내 지도들처럼 우리 행동과 백사장과 따뜻한 조수의 깊은 흐름을 파악하려는 특별한 나의 의도와 신중함을 독자들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9쪽_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처음에 읽을 때에는 각각 다른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열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상징과 풍자로 뒤섞인 113편의 거대한 퍼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느낀 후로는 그저 대단하다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다닌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큰 틀에서 바라보며 이리저리 휘저으니 그의 상상력 앞에 주눅이 든다. 그러면서도 몇 초간 휴식하며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제발 그가 끝없이 창작하고 상상의 세계를 널리 퍼뜨리기를 바라게 된다.
이 책을 읽는다면 저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실행하기를 바란다.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테니 눈 딱감고 믿어보기를 바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의 세계에 초대받을 것이다. 조금씩 읽어나가다보면 그가 말하는 세계에 나만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책을 읽으면 연결되는 다른 이야깃거리가 저절로 떠오르게 되니 읽는 맛이 더해진다. 그는 진정 이야기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