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읽을 때에는 별다른 정보 없이 읽는 것을 선호한다. 이 책이 일본 소설이며 제51회 문예상 수상작이라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읽어보게 되었다. 표지의 으스스한 그림을 보고 나서야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잘못 짐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라고 말한다면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해주면서 살아갈 희망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선입견을 와장창 깨준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이 신선했다. 정 반대의 의미를 주는 제목으로 시작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옮긴이의 말에 이런 글이 있다.

일본 인터넷을 검색하다 찾아낸 어느 블로거의 지적대로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라는 제목 또한 두 가지로 읽힌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그런 생각일랑 접게 해줄 테니'라는 뜻인가, 아니면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기꺼이 도와줄 테니'라는 뜻인가. 어쩌면 세계는 이 양극단을 번갈아 오가는 거대한 혼돈인지도 모른다. 그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그 결정에 이 압도적인 파멸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깊은 파장의 울림이 영혼을 뒤흔드는 문학의 힘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13쪽)

 

띠지에 있는 가장 현대적인 로맨틱 '악녀 소설' 탄생! 이라는 말이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와닿지 않았다. 읽고 나니 알겠다. '현대적', '로맨틱', '악녀 소설', 이 세 단어가 각각 따로 노는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제일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한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다. 이 책의 남자 주인공 도쿠야마는 아르바이트 동료들과 찾은 단란주점에서 하쓰미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쥐어준 명함에는 '야마나카 하쓰미'라는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그리고 '힘들거나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주세요. 언제든지'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여기서,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소설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서서히, 그리고 급격히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는 그렇게까지 섬뜩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하쓰미의 책장에 줄줄이 꽂힌 책의 제목에 '살인','잔혹','지옥','엽기','고문','학살' 같은 오싹한 단어가 빽빽히 채워져 있었다는 것과 책의 내용을 말해주며 육체를 탐하는 장면이 특이하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하지만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묘한 공포가 휘몰아친다. 도쿠야마라는 한 인간이 소멸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이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듯한 도쿠야마를 보게 된다. 그것이 하쓰미를 얻은 댓가라면, 과하다. 지나치게.

 

"죽읍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에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동반자살하자고요. 응? 응?" (164쪽)

하쓰미는 죽을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젊어서 아직 상처가 적은 동안일 때 동반자살을 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자살시도의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도 예상 밖의 흐름이었다. 영화에서처럼 멋지게 자살하며 생을 마감한다든지, 서로 죽여주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런 점이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예상 외의 반전이었다.

 

이 소설은 파멸로 향해가지만 파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독자를 끝까지 순식간에 끌고 가는 것도 이 소설의 힘이지만, 마지막에 앞에 읽은 내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또다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될 때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제목부터가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었는데, 소설 내용 자체도 나를 혼돈에 빠지게 한다. 나도 이 소설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나보다. 처음에는 거부하고, 그 다음에는 환멸과 타락을 인정하고, 뒤이어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이내 파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유쾌하지는 않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뻐근하다. 그동안 소설 속의 세계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이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말이다. 거부하지 않고,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못하며,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도쿠야마에게서 무언가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라는 제목을 다시 보니 으스스한 느낌에 밤잠을 설칠 듯한 예감이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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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09-0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표지만 보고 지레짐작 했는데.. 리뷰 읽어보니 급 궁금해지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당!

카일라스 2015-09-08 18:27   좋아요 0 | URL
일본소설이 그렇듯이 읽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제가 한정해놓은 세계를 벗어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