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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 안도현 아포리즘
안도현 지음 / 도어즈 / 2012년 11월
평점 :
때로는 책 한 권 속의 글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글귀 속에 함축된 어마어마한 의미를 읽어낼 때의 묘미, 구구절절 길게 설명된 글보다 강한 임팩트가 있다. 이 책은 안도현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고 한다. 짧은 글 긴 생각, 이 책을 읽으며 바라는 바대로 여운이 남았다.
나에게 묘한 여운을 주며 자꾸 떠오른 글은 내가 미식가인 까닭이라는 글이었다.
집 안에서 내 눈에 거슬리는 놈 중의 하나가 냉장고다. 날이 갈수록 냉장고가 쓸데없는 욕심으로 덩치를 불려가고 있는게 나는 못마땅하다. 냉장고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모든 음식은 원래 지니고 있던 맛을 쉽게 잃어버리기 일쑤다. 어느 때는 냉장고가 음식을 잘 보관해 주는 게 아니라, 음식의 맛을 빼앗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식의 맛은 음식의 영혼이 아니던가. 영혼 없는 시금치 무침이 나는 싫다. 냉장고의 야채 저장고에서 오랜 시간을 버틴 상추와 풋고추의 그 뻔뻔스러움이 나는 싫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냉장고에게 다 내주고 야채랍시고 낯짝만 푸르뎅뎅한 것들이다.
(안도현의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中 42~43쪽 내가 미식가인 까닭)
끼니를 준비할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아직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야채들을 보게 된다. 장을 볼 때 기본 천 원어치는 사게 되고, 가끔은 덤으로 얹어지는 분량을 감당하지 못한다. 싱싱한 상태에서 나에게 먹히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푹 삶아서 무쳐지거나 찌개 속으로 들어간다. 생활 속의 공감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고, 자꾸 떠오르는 글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사진이 흑백으로 담겼다는 것이었다. 사진이 주는 메시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텐데, 좀 아쉽다. 하지만 어쩌면 글이 더 돋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짧은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기 좋은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