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금지어 사전 - 보기만 해도 상식이 채워지는 시사 개념어 수업
김봉중 지음 / 베르단디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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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책장을 열자마자 눈이 먼저 멈춘 건 낯익은 단어들이 낯설게 배치된 풍경이었다. 사람 중심의, 배리어, 임신한 사람, 무의식적 편견 같은 표현들이 단순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사회와 권력의 구조 속에서 금지당하고 지워지는 순간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언어가 단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 책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금지어 사전》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것이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공공기관에서 사용을 금지한 170여 개의 단어들이 시대의 풍경과 함께 펼쳐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1984』의 뉴스픽(Newspeak)을 상기시킨다. 뉴스픽을 통해 언어를 줄이고 왜곡하며 결국 사고 자체를 통제하려 했던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이, 트럼프 시대의 금지어 정책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이다.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을 뜻하는 DEI 프로그램이 2025년 1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관련 직원들이 해고되거나 직위해제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의 결정을 따라 기업들마저 다양성 정책을 멈추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사회의 약자들이었다. 불평등을 지우는 대신, 불평등이 없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권력이 작동한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금지어들은 단순히 언어적 논란을 넘어, 사회적 긴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임신한 여성(pregnant woman)이라는 표현 대신 임신한 사람(pregnant person)을 쓰려는 흐름은 성별 이분법에 갇힌 언어를 넘어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제재하고 형사처벌 대상으로까지 지정했다. 오직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한다고 행정명령으로 못 박은 것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언어가 배제의 도구로 사용될 때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되는지 새삼 실감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멕시코만(Gulf of Mexico)을 미국만으로 바꾸려 했던 에피소드였다. 단어 하나가 국가 정체성과 영토 개념을 뒤흔들 만큼 큰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이보다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연방기관은 명칭을 바꿨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도 법적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단어의 선택이 곧 권력의 확장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언어 전쟁은 곧 정치 전쟁임을 이 책은 시사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경각심이었다. 우리가 무심히 쓰는 언어 하나가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또 다른 누군가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책은 단어를 나열하는 사전이 아니라, 언어를 둘러싼 권력의 얼굴을 들추어내는 기록이다. 그리고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지금 벌어지는 것은 단어의 전쟁이며, 우리는 그 전쟁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또한 소속감(belong)이라는 단어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권력은 늘 분열과 배제를 통해 힘을 유지해 왔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너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도구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소속감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트럼프 금지어 사전》은 미국의 이야기이지만, 결코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언어를 통제하고 불편한 단어들을 지워내려는 권력의 시도는 어느 사회에서든 반복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배제되거나 조롱당하는 표현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 책은 그런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어를 지우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숨결이자 기억의 저장소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지우는 순간, 그 사람의 존재도 지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트럼프 금지어 사전》은 언어의 가치를 일깨우는 동시에,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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