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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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작 구입해두고 미루고 미루다가 읽게 되었다. 그러는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꼽고 싶은 이유는 책 속 글씨가 작고 빽빽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집어 들고 보니, 천천히 조금씩 음미하며 야금야금 맛보아야 하는 글이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된다.

다소 얇은 듯한 책이지만, 읽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한 걸음식 천천히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되겠다.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공연예술.

현장감 있게 감상할 수 있으면서도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공연'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공연예술은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 방식이 시간에 기대고 있어,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그러므로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 (6쪽)

공연 비평.

저자는 사람들이 문학 비평이나 영화 비평을 읽는 것처럼 공연 비평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글을 읽다가 흥미로울 경우 뒤늦게 찾아볼, 작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생과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공연'이라는 예술을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하는 듯하다.

나에게 공연은 그저 옛날에 보긴 봤고 기억조차 희미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그의 기억을 함께 해본다.


이 책의 저자는 목정원. 서울대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렌느2대학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공연예술이론 및 예술학일반을 가르치며,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쓴다. 가끔 사진을 찍고 노래 부른다. (책 속에서 작가 소개 전문)

이 책에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동안 프랑스에 살면서,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두 해 반을 더 보내면서 품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보았던 무대, 걸었던 풍경, 만났던 사람, 못 지킨 죽음, 읽었던 말들과 불렀던 노래가 담겨 있다. 이는 그 모든 지나간 것들에 대한 뒤늦게 쓰인 비평이다.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 유예되고 간직되었던. 어쩌면 삶도 한 편의 공연처럼 흘러가면 그만이기에. (7쪽)


이 책은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오묘하다.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를 만나러 우리는 그곳에 간다. 몇 시간짜리 허구를 기꺼이 함께 용인하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 지구 위에는 내가 사랑하는 극장들이 몇 있고, 사랑을 촉발시킨 것은 대체로 거기서 마주한 허구의 세계였다. 나는 아름다운 가상을 만난 곳에서, 그 공간을 또한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다. (11쪽)

이 책을 읽으며 극장이라는 공간부터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은 극장이라는 공간으로 비유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무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관객들, 무대 밑 공간, 배우들의 대기 공간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세밀한 시선으로 조심스레 살짝 건드리면서 파고드는 장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함께 고찰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이다.


그녀의 문장은 이렇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툭 건드려주어서 나의 상상의 영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 그런 의미이겠구나!'하고 다시 바라보고 생생하게 살려낸다.

만일 당신이 춤을 춘다면 나는 가만히 앉은 몸으로도 그 춤을 따라 추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무대 위의 도약하는 몸이 저토록 가볍기 위해 얼마나 무겁게 근육을 조이는지, 저 한없는 회전이 얼마나 아찔하게 어지러움을 비껴가는지, 바닥을 기는 무릎은 어떤 저릿함으로 납작해지는지. 오직 몸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그만큼 더 춤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다. (155쪽)

프랑스 극장들의 시즌은 가을에 시작된다. 긴 바캉스를 끝으로 동네의 상점들이 문을 열고, 반가운 얼굴들이 돌아오고, 개강을 맞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거리를 점령하고, 여름 끝 무렵의 눅진한 볕을 맞으며 사람들은 카페 테라스에 앉고, 청명한 바람이 섞여들고, 잎은 초록을 내려놓는 계절. 일상이 돌아온 그 자리에 여름 내 닫혀 있던 극장의 문도 열려, 미리 예매해둔 새 시즌의 티켓을 하나씩 꺼내들고 집을 나서는 날들. 시즌 첫 공연의 왁자한 로비. 객석의 불이 꺼질 때 익숙한 두근거림을 되찾던 가슴. (153쪽)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가다 보면 현장감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파리에 갔던 것도 가을. 그때의 길거리와 왁자한 사람들의 모습, 카페 테라스에 시끌벅적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던 풍경, 그런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파리 현장에 내가 있는 듯 심취하며 읽어나간다.

언어를 통해 사유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선형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 머릿속에 문장이 줄지어 흘러간다. 우리가 살아갈 때, 눈앞에 세계가 지나간다. 그 가없는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재라는 찰나 속에 우리는 산다. 일몰의 시간, 사라지는 빛이 물들이는 하늘을 보며 옆에 선 이에게 아름답지, 말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에게 허락한 생의 방식이다. (179쪽)

개기월식도, 결혼식도, 생일도, 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소중하다. 그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무심히 지나가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소중히 숨결을 불어넣고 가치를 되살려주는 표현을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스르륵 넘길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머물면서 음미해야 한다.

저자가 글 속에 표현한 존재들과 공연 등을 되살리며, 내 오래전 기억들도 함께 떠올리는 시간을 보낸다. 파리의 기억도, 그 밖의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에서 교차점을 발견하며 한참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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