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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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하면 떠오르는 시를 감상하고 시작해야겠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이다.

나에게는 이제 이 시가 다르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기 이전과 이후가 감상이 달라지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었기 때문에 이 시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듯하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나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버지니아 울프(1882~1941)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실험적 모더니즘 작가이자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켰다.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895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최초의 정신질환 증상을 보였고, 190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증상이 악화되어 자살을 기도했다. 이후 화가인 언니 버네사 벨과 함께 훗날 블룸즈버리그룹으로 알려진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지식인, 예술가와 교류했다. 1912년 그룹의 일원이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하고, 1917년 남편과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 설립해 자신의 작품들과 T.S.엘리엇, E.M.포스터, 캐서린 맨스필드 등의 작품들, 프로이트의 초기 저작들을 출간했다. 런던과 서식스다운스를 오가면서 평론, 집필,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황과 이에 따른 정신적 고통으로, 1941년 강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책날개 중에서)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가장 탁월하게 사용한 울프의 대표작이자, 유년 시절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의식의 흐름'이라고 해서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을거라 짐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단 읽기 시작하니, 섬세하고 시적인 표현에 매료되어 결국 빠져들고 말았다.

이 소설은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램지 부부와 여덟 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램지 가족과, 그들이 여름 별장이 있는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에서 지낼 때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버지니아 울프만의 시선으로 표현해내었기에 아무것도 아닌 듯한 사소함이 특별함으로 담겼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서사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그 감수성 가득한 시적인 표현에 파고든다.

특히 개개인의 심리묘사를 아주 잘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면서 사람 심리를 들여다보았다.



옮긴이의 말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이 글이 이 작품에 대해 잘 표현해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너무 길고 지루하고, 《율리시스》는 읽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반면, 《등대로》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예외적인 것들로 바꿔놓는 놀라운 상상력과 정확한 시적인 묘사, 그리고 거의 모든 것에서 유머의 요소를 발견하는 탁월한 재능을 잘 보여주는, 울프를 제대로 알고 울프의 매력에 빠지기에 더없이 좋은 작품이다. (359쪽)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등대로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새롭게 런칭하는 세계문학전집 '에세(ESSE)'의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울프 탄생 140주년을 기념하여 소설가 정영문이 원문의 문체를 살리며 섬세하게 옮겼다는 것이다.

에쎄(ESSE)는 서구 남성 작가 중심의 정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문학의 존재 의의를 새롭게 하려는 은행나무출판사의 새로운 세계문학 시리즈라고 한다.

이 책을 1권으로 하여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이 출간될 예정이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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