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나도 한때 멋모르고 가드닝을 꿈꿨지만, 재빨리 포기했다. 한때라도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이 책이 궁금했다.

잘 가꿔진 정원을 보면 아주 오래전엔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마어마한 노력이 짐작된다.

잡초 뽑고 때때로 물 주고 가꿔나가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돌아서면 잡초가 쑥쑥 자라있는 계절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과 노력이 보인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가 카렐 차페크라고 한다. 카렐 차페크(1890~1938)는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인류의 부조리를 촌철의 유머와 위트로 풍자한 작품을 다수 남긴 그는 평생 정원을 손수 가꾼 열혈 정원가였다고 하니, 그가 들려주는 정원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이 책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어보게 되었다.



글 카렐 차페크.

189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북동부의 말레스바토뉴비체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적 취향이 강한 어머니 밑에서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과에 진학해 베를린과 파리의 대학들을 오가며 공부했고, 25세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실용주의와 베르그송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체코의 유력 일간지인 <나로드니 리스티>와 <리도베 노비니>를 차례로 거치며 평생을 저널리스트로 일했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6년 형 요제프 차페크와 함께 쓴 산문집 《빛나는 심연》의 출간을 시작으로 소설, 희곡, 에세이,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철학적 통찰과 위트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파시즘에 대한 풍자를 담은 《R.U.R》을 비롯해 《도롱뇽과의 전쟁》, 《압솔루트노 공장》, 《호르두발》, 《곤충 극장》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나치를 맹렬히 비판했던 그의 정치 성향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유명한 후문이 있다. 나치 게슈타포는 그를 '공공의 적 3호'로 지목했다.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하기 몇 달 전인 1938년 12월, 지병으로 인한 폐렴이 악화되어 생을 마쳤다.

그림 요제프 차페크

20세기 초 체코 입체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무대 미술가와 극작가로도 활동했으며,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도 독창적이고 빼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일간지 <나로드니 리스티>와 <리도베 노비니>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간간이 예술평론을 썼다.

동생 카렐 차페크와 창작의 아이디어를 늘 함께 나누었고, 몇 편의 작품을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비롯해 카렐 차페크의 여러 책에 재치 넘치는 삽화를 그렸다. 1939년 반파시즘 활동으로 체포되어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책날개 작가 소개 전문)



카렐 차페크(왼쪽)와 요제프 차페크(오른쪽)는 평생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지냈다. 그들은 친형제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고 동지였다. 프라하의 비노흐라디에는 차페크 형제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들이 살았던 집이 있다. 두 채가 나란히 붙어 있는 집에 살면서 형제는 오랫동안 정원을 함께 가꾸었다. 《정원가의 열두 달》은 바로 그 정원 속에서 길러진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에 비공개 글들이 더해져 1929년 체코 프라하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책 속에서)



정원에 대한 글을 보겠다고 집어 들었다가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서 들떴다.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정치, 문화, 사회 분야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카렐 차페크, 체코어의 거장, 체코어의 마술사,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

어쩌면 나는 작가의 거창한 위치를 먼저 알았다면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 부담감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무겁고 진중한 글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겼을 테니까.

하지만 그저 '정원에 관한 열두 달의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이 책을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그리고 이 책은 본문부터 그냥 뛰어들어 읽어나가도 좋겠다.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으며 '맞아, 맞아' 공감할 수 있으니까.



내가 귀촌을 꿈꾸고 실행에 옮겼을 때, 나는 야외 테이블에서 우아하게 석양을 바라보며 티타임을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모기에게 잔뜩 뜯기는 데다가 온갖 벌레들이 달려들고 소리를 내며 휙 지나가기도 하니, 감성적인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수해야 한다.

잔디밭은 또 어떤가. 그 와중에 잡초는 또 얼마나 많이 자라는지, 어느 순간 잡초가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여름에는 손쓸 틈 없이 무성하게 자란다. 잡초가 자라며 벌레들도 극성이다. 그래서 귀촌 이후에 나는 여름이 무섭다.

처음에는 정원을 가꾸고 이쪽에는 이 꽃들을 심고, 저쪽에는 저 꽃들을 심어야지, 생각했다. 방울토마토도 가꿔서 수확해서 먹고, 고추, 가지, 상추 등 채소도 심어서 식사 준비하다가 밭에서 즉석 해서 쓱쓱 뜯어와서 밥상에 올려야지 등등 야무지게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멋모르고 밭에다 그냥 씨를 뿌렸더니 새벽부터 짹짹, 동네 새들이 잔치를 해서 다 먹고 가고, 다시 오일장에서 모종을 사 와서 심어서 키웠을 때에는 벌레들이 점령을 해서 얻어먹을 것도 없었다.

벌레와 5 대 5 정도는 용인할 수 있었지만, 결과는 9 대 1 정도로 점령당하고 참패했으니, '안 먹어 안 먹을 거야.'라며 여우의 신포도처럼 생각하고 말았다.

어쩐지 오일장에 호미 사러 갔을 때, 호미 파는 할머니가 "그냥 사다 드시지……."라고 하신 말씀이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종 사고 키우고 하느니, 사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내가 내 이야기부터 신나서 가득 펼치는 데에는 이 책이 그 이야기를 끌어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력 있는 정원가에게는 나와 반대의 문제도 있었다.

나도 당근이나 사보이, 상추, 콜라비를 재배해본 적이 있다. 그것도 여러 번. 물론 농부의 삶에 대한 낭만적 환상으로 시작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매일 혼자서 무 120개씩을 먹어 치워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족 누구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은 사보이 늪에서 허우적댔고, 또 다음 날에는 질기디 질긴 콜라비를 미친 듯이 먹어야 했다. 넘쳐나는 상추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 주 내내 상추로 삼시 세끼를 해결한 적도 많다. 채소밭 정원가들의 즐거움을 깰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채소를 재배하면 자신이 기른 것들을 입안에 마구 욱여넣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15~116쪽)

이런 문제든 저런 문제든,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어서 더욱 '맞아, 맞아' 공감하며 읽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포기했지만, 작가는 해냈다. 카렐 차페크와 요제프 차페크 형제는 해냈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정원의 열두 달을 가꿔나간 이야기에 시선을 집중해본다.



우아한 정원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정원 생활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언가 나에게 더 와닿는 느낌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멀찍이서 훑어만 보던 시절, 나는 정원가란 새소리를 벗 삼아 꽃의 향기를 음미하는 존재, 세상과 거리를 둔 온화한 성품과 시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보다 깊이 발을 담그면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원가는 집요하게 땅을 파내어 흙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를 게으른 사람들의 눈앞에 척 내보이는 존재다. 그네들은 땅에 파묻혀 살아가며 퇴비 더미 위에 자신의 공적비를 세워 올린다. (56쪽)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까, 신기한 것도 많았다. 독특한 상상력과 시선으로 풀어내니 저절로 집중하며 읽어나가게 된다.

정원가는 물론 자연 진화의 산물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정원가가 자연적으로 진화한 존재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쭈그려 앉을 필요가 없도록 딱정벌레 같은 다리를 가졌을 테고, 등에는 날개도 돋아났을 거다. 보기에도 예쁘고 화단 너머로 둥실둥실 떠다닐 수 있으니까.

발 디딜 자리가 없을 때 사람 다리라는 게 얼마나 제구실을 못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흙을 가만히 찔러보기 위해 몸을 웅크려 앉노라면 다리가 어찌나 쓸데없이 길게 느껴지는지. 제충국 한 무리나 매발톱꽃 싹을 밟지 않고 화단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아 할 때는 또 왜 이렇게 다리가 짧게 느껴지는지. 몸뚱이를 밧줄에 매달고 화단 위를 날아다닐 수 있다면. 차라리 이 몸이 모자 쓴 머리 하나와 손 네개(혹은 그 이상)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도 아니면 카메라 삼발이처럼 팔다리를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정원가의 신체도 다른 인간들의 몸처럼 불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원가는 어떻게든 주어진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80쪽)

이 뒤로도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사실 여기에서 끊기도 아쉬웠다. 이러다가는 이 책을 전부 담아버릴 듯해서 멈춘다. 어디에서 끊을지 판단이 안 될 만큼 재미있고 솔깃하다.



정원가와 대화할 일이 생기거든 꼭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져라. "이 장미의 이름은 뭔가요?" "이건 버미에스터 반퇼레예요." 정원가는 굉장히 신이 나서 대답한다. "그리고 저 녀석은 마담 클레어 모르디에르라고 하죠." 이제 그는 당신을 교양 있는 사람이라 여기며 한층 정중하게 대할 것이다. 반면 섣불리 아는 척하는 건 금물이다. 예컨대 "이 아라비스 꽃 정말 예쁘네요."라고 말한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뭐라고요? 그 아이는 스치에베렉키아 본뮐레리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 싶겠지만 이름은 중요한 것이니까. 우리 정원가들은 좋은 이름에 대해 까다로운 취향을 지녔다. (83쪽)



이 책은 저자의 표현은 물론, 곳곳에 있는 삽화도 시선을 끈다. 글과 삽화가 잘 어우러져서 가독성을 높이고, 그들의 정원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또한 단순히 유머만이 아니라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철학이 들어있어서 사색에 잠기게 한다.

정원에 있는 것들은 시시각각 비율이 어그러진다. 그래서 가을이면 식물을 이리저리 옮겨 심게 된다. 정원가가 해마다 여러해살이를 안아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꼭 새끼를 물어 옮기는 어미고양이 같다. 그는 뿌듯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 심었군. 드디어 조화가 딱 맞네!" 다음해에도 똑같은 말을 한다. 정원은 언제나 미완의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꼭 닮았다. (166쪽)



가벼운 분량 속에서 느껴지는 진한 여운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매달 변해가는 정원의 모습이 시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다가, 어설프면서도 욕심 가득한 정원가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익살스럽다가, 또 어느 순간 날선 사회 풍자가 훅 치고 들어온다. 이 때문에 책을 읽고 난 뒤 독자들에게 남는 인상도 제각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가드닝에 대한 로망을 충족시켜줄 따뜻한 정원 에세이로, 어떤 이에게는 통쾌하고 강렬한 인문에세이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내가 정원가 지망생이었던 그때에 이 책을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상관없다. 지금은 여전히 정원을 가꿀 마음을 접고 있고, 그 마음이 다시 싹을 틔운 것도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웃고 공감하고 내 이야기도 막 떠들면서 나는 '이거면 되었다!'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이 입에 착착 감기며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한다.

'나도 그런 적 있어.' 혹은 '정원일을 더 본격적으로 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구나!' 등등의 생각으로 웃고 공감하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보낸다. 한바탕 마음을 휘젓고 지나간 책 《정원가의 열두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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